박사장은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봤다. 그는 누워있는 현석을 한 번 흘겨보고는 코웃음쳤다.
“사람 한 명 조져놨다고 끝난 것 같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방에서 구두소리가 들려왔다. 불과 몇 초만에 공장은 수십 명의 발자국소리로 들어찼다. 고개를 들자 이미 공장 구석구석, 사방에서 정장차림의 남자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허......!”
심지어 다양했다. 검은 정장, 회색 정장, 남색 정작, 갈색 정장. 정장에 어울리는 색은 거의 다 있는 것처럼. 물론 그 중에 제대로 갖춰입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마저도 다들 자켓을 벗어던지고, 소매를 풀어헤치고, 몸에 감춰놓은 문신을 보이면서 내 쪽으로 거칠게 다가왔다. 심지어 한 명 한 명이, 현석에 필적할 정도로 덩치가 좋았다!
“아까 그냥 핸드폰 주고 가라고 했을 때 가지 그랬냐. 어? 왜 일을 이렇게 번거롭게 만들어.”
박 대표는 슬쩍 내게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그 사이 사방에서 몰려나온 수십 명의 남자들은, 나를 원형으로 둘러싸고 금방이라도 나를 덮칠 것처럼 자세를 잡고 있었다.
망했다.
망한 정도가 아니라, 진짜 큰일 났다.
“어때, 지금도 나한테 사과하라고 하고 싶냐?”
“영화 주인공이 된 기분인데.”
배를 하도 얻어맞았는데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이상하게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새끼, 헛소리를..... 야, 얼른 핸드폰만 내 놔. 귀찮게 우리가 찾아내게 하지 말고.”
몇 번 기침을 콜록이다가 겨우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주위를 둘러보면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사람들을 보다가, 나는 최대한 생각할 시간을 끌 요량으로 천천히 대답했다.
“내 물건이나 돌려줘.”
“이거?”
박 대표는 아까 현석에게 받은 호출기를 들어보였다. 한서아씨에게 받은, USB로 위장한 호출기였다. 누르면 30초 안에 온다더니 몇 분 후에야 나타났던 그 호출기.
콰직-
그리고 그는, 그 버튼을 야무지게 밟아버렸다.
“아이고, 여기에도 넣어 놨어? 애 좀 썼네, 이 새끼야.”
혹시나 하는 상황에서 마지막 카드로 가지고 있었던 건데!
냉정해지자, 지금 당장 해야 할 건 뭐지? 탈출? 어디로? 열린 창문? 다 잠겨 있는데? 문은? 사람들이 다 막아놨고, 갈 곳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다.
“야, 뭐해, 이 새끼들아! 빨리 안 움직여?”
“예!”
대답은 일제히. 꼭 훈련소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곧바로 사방에서 남자들이 덮쳐왔고, 나는 당장 잠깐이라도 피할 요량으로 곧장 위를 보고 -
콰아아아앙-!!!!
“어!?”
“뭐야!?”
그리고 요란한 소리에 공장에 있던 모든 사람의 행동이 멈췄다. 수십 명의 머리가 돌아간 곳은 공장의 한 쪽 벽. 누군가 폭탄이라도 터뜨린 것처럼, 공장의 벽 한 쪽이 커다랗게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아니, 무너진 것이 아니라 폭발해있었다!
“콜록, 콜록. 하 씨바, 먼지 봐라.”
이어진 목소리는 여인의 목소리. 부드러운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상스러운 욕이 흘러나왔고, 곧 이어 휘날리는 먼지를 뚫고 익숙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야 임마!”
그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는 무서웠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
“이 새끼야, 내가 갈 수 있는 곳에서 사고 치랬지!”
“컥!”
안도의 감정을 느낄 새도 없이 명치에 엄청난 충격이 느껴졌다. 허리를 숙이고도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나는 한참동안 꺼억 소리를 내며 겨우 눈만 위로 부릅떠야만 했다. 겨우 치켜뜬 눈 앞에서는 푸른 빛이 도는 검은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길게 흩날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사고를 친 건데?”
한서아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나를 덮치려고 했던 남자들은 아직도 원형을 유지한 채 빽빽하게 서 있었다.
“야, 괜찮냐? 야, 잠깐. 살살 쳤는데?”
“콜록...... 누나, 누나 혼자 온 거에요?”
“어, 왜?”
망했다.
진짜로 망했다.
아주 잠깐, 세일 그룹의 보안 요원 수십 명이 달려들어도 눈 하나 깜짝않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세의 이야기고. 실제로 날 잡으려는 사람이 수십 명인데 혼자서 돌파할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아니 왜..... 아까는 다른 아저씨들 오신다면서요?”
“아저씨는 무슨 아저씨들. 있어봐, 좀.”
“저건 또 뭐야?”
박 대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정장입은 남자들 사이에 가려서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는 아무래도 그 무리들 가운데에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눈을 들어보니, 나와 한서아씨를 둘러싼 사람들 말고도 박 대표 옆에서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도 열 명은 족히 넘어보였다.
“야, 야. 됐고, 빨리 정리해. 둘 다 조져놓고 저 새끼 핸드폰은 나한테 갖고 와.”
“아하. 그런 상황이야?”
한서아씨의 한 쪽 입꼬리가 씰룩, 움직였다. 웃는다고? 이 상황에서?
“하나, 둘 셋, 넷... 저렇게 아홉, 열 다섯에....”
“뭐하는데요?”
“있어봐. 스물, 스물 셋, 스물 다섯...... 저렇게 넷 해서 스물 아홉......”
박 대표의 명령에도 사람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한서아씨가 부수고 들어온 벽을 살피느라, 또 사람 숫자를 세는 한서아씨의 당당한 태도 때문에 황당한 나머지 주저하는 듯 했다.
잠깐, 벽! 무너진 벽!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한서아씨가 들어오면서 터뜨린 벽은 무너져내려서 바깥의 풍경이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누나, 잠깐! 저기, 곧바로 도망갈 수......”
“우수하. 정신 차려.”
따악-!!
순식간에 눈 앞이 번쩍이면서 사방이 잠깐 밝아진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두개골에 구멍이 나진 않았을까 걱정될 정도의 통증이 이마 한복판에서 느껴졌다!
“아.....아악!!!”
“야, 야. 생각해, 생각.”
“아오씨...... 무슨 생각이요?”
한서아씨는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어차피 핸드폰으로 찍은 것 가지고는 증거가 안 돼. 원본이 필요하다고.”
“그런데요?”
“그럼 범인이 가장 먼저 하려는 건 뭐겠어?”
이마를 맞아서 그런지 머리가 싹 비워진 기분이었다. 그 덕에 온 몸을 옭아매던 두려움도 한 꺼풀 벗겨진 느낌. 한서아씨의 다그침에 나는 겨우 머리를 굴렸다. 어느새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에 대한 걱정은 잠시 뒤로 미뤄둔 채로.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이 사람들은.......”
“사람들은 나한테 맡기고. 너는 네가 해야할 일을 해. 너만 할 수 있는 일.”
눈을 돌렸다. 한서아씨의 뒤로 무너진 벽이 보였다. 어둡지만 바깥의 달빛이 환하게 보이는 곳. 저기로 한 번만 순간이동을 하면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건 금방이다. 길을 따라서 순간이동만 계속 하면 되니까.
하지만 눈을 조금만 돌리면 그 자리에는 박만기 대표가 있었다.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건장한 남자 열 댓명의 호위를 받으면서.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부하들을 한 번 다그치고는 곧장 몸을 돌려 사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야, 얼른 치워라!”
“예!”
그 다음 상황은 불보듯 뻔했다. 덩치 큰 남자들이 사방에서 몰려오고, 곧 둘러싸여서 얻어맞다가 잡혀가든지, 죽든지 하겠지!
“날 믿고, 너만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마지막으로 귓가에 남겨진 말이었다.
“진짜로.......?”
하지만 대답할 시간은 없었다. 이미 사방에서 정장차림의 남자들이 뛰어오고 있었고, 한서아씨는 내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래, 한 번 걸어보자. 사실 믿는다기보다 될 대로 되라의 느낌이다. 세일그룹의 보안요원 수십 명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았던 한서아씨였다. 제압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뭔가 시간을 끌만한 건덕지가 있겠지! 나는 사방에서 덮쳐오는 사람들을 무시하려 애쓰며, 곧바로 내가 가야할 곳으로 눈을 돌렸다!
처음에는 천장으로 순간이동했다. 그래야 박 대표가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볼 수 있었으니까. 아까 현석을 떨어뜨렸던 천장의 철골에 매달린 채로, 나는 뒤로 도망가는 박대표를 똑똑히 눈에 담았다. 바로 가고 싶었지만 아직은 그의 옆에 딱 달라붙은 사람들이 많아서 가도 소용이 없었다.
“야, 야......! 뭐 해!?”
하지만 그 여유만만한 박대표의 표정이 일그러진 건 순식간이었다. 그 이유는 굳이 눈을 돌려서 상황을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쾅. 처음 들린 소리는 그랬다. 쾅, 처음 한서아씨가 벽을 부수고 들어왔을 때처럼, 수류탄 터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뭔가 무너지는 소리 같기도 한 엄청난 굉음이 한 번 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그것보다 조금 작은 쾅, 하는 소리가 여러번. 그게 다였다. 콰앙, 쾅쾅쾅, 그리고 중간에 가끔씩 사람의 주먹이 꽂히는 끔찍한 소리나 옷이 펄럭거리는 소리들 뿐. 아마 한서아씨가 뭔가를 준비해온 모양이었다!
“너도 가, 너도 가! 다 달라붙어! 죽여버려, 그냥!”
박대표는 그렇게 말하고 헐레벌떡 뒤로 뛰어가고 있었다. 소리의 근원을 파헤치기보다, 지금은 내가 할 일에 집중할 때다. 나는 박대표가 올라가려던 층계참의 중간으로 순간이동했다.
“어딜 가려고?”
“깜짝이야! 이 새끼, 어느 틈에......!”
박대표의 앞을 막는 건 간단했다. 하려는 행동이 뻔하니까 목적지도 뻔할 수밖에. 그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은 증거의 완벽한 인멸이다. 사무실에서 액기스만 챙겨서 도망치거나, 그게 안 되면 시간을 끌면서 전부 파쇄하겠지.
“너, 너 정체가 뭐야? 어떻게 여기저기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지금이라도 사과할 생각은 없어?”
박대표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코웃음치며 그 자리에서 팔짱을 꼈다.
“뭐, 내가 사과하면 봐주기라도 하게?”
“그건 아니지.”
괜히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없었다. 한서아씨가 무슨 수를 쓰는지는 몰라도 백 명 가까운 사람들을 상대로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대체 내가 왜 사과를 해야하는데?”
“잘못했으니까. 정작 당신 잘 살자고 벌인 일에 아파하는 사람들은 정직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이니까.”
“말했잖아, 이 새끼야. 그렇게 착하게만 살면 살아남지를 못해, 어?”
“핑계대지 마. 당신이 대표이사가 아니라 시한부에 백수건달에 빚이 수백억이 있다 해도 당신이 저지른 짓을 합리화할 수는 없어.”
“어린 놈의 새끼가 말은 잘해요. 원하는 게 뭐야?”
“원하는 거?”
“뭐 돈을 줄까? 이러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어? 그냥 정말로 날 혼내주려고 하는 거야?”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유는 처음부터 명확했다.
“어.”
“대표님!”
그 때, 내가 등지고 있는 사무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단의 맨 위, 사무실 문 앞에는 아까봤던 작은 체구의 사내가 라이터를 들고 서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이미 내용물이 텅 비어있는 기름통들이 텅 소리를 내며 굴러다니고 있었고, 그 내용물이 흘러들어가고 있는 곳은 - 사무실이었다!
“대표님, 준비 됐습니다!”
“어쩌냐, 이 새끼야? 증거가 다 없어질 것 같은데?”
등 뒤의 사무실은 불타기 직전이고, 바로 앞에 박 대표는 금방이라도 도망갈 태세고.
“후우......”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해야할 일은 명확했지만 확실히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증거물은 증거물대로 지키고, 박대표는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는다.
“야, 말 해 봐. 얼마나 필요한 건데, 어?”
옆으로 서서 양쪽을 번갈아 쳐다봤다. 계단 아래에서는 득의양양한 박만기 대표가, 계단 위에서는 라이터 뚜껑을 열고 금방이라도 불을 붙일 기세의 남자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시간은 없고 방향은 정해야 한다.
“뭐, 뭐야?”
비명소리가 나온 건 위층에서였다. 남자는 눈 앞에서 내 모습이 사라져서 당황했고, 곧바로 박대표의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
“야!! 이 새끼야, 뒤에!!”
빠악-!!
라이터를 든 남자의 뒤로 순간이동하자마자, 나는 곧바로 있는 힘을 다해 남자의 머리를 후려쳤다!
“억......”
남자의 몸이 앞으로 기우는 사이, 나는 곧바로 그의 팔을 붙잡아 라이터를 뺏었다.
“이익!!"
그 다음이 마지막, 박대표를 도망치지 못하게 막는 것!
“이 새끼가!!”
그런데 어쩐지, 그는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어?”
그리고 내가 당황한 사이 그의 억센 주먹이 내게 똑바로 날아들었다.
눈 앞의 풍경이 순식간에 땅바닥으로 변했다. 볼에 번쩍하는 통증이 느껴진다 싶었을 때, 나는 이미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을 바라본 채 쓰러지고 있었다.
“컥!”
겨우 한쪽 발로 버티자마자 머리가 띵하게 울려왔다. 하지만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곧바로 박대표의 발길질이 가슴에 꽂혔다-
“이 새끼, 이 새끼가!!”
그 다음에는 결국 다리가 풀려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할 수 있는 건 몸을 있는대로 웅크리고 맞는 구석을 최대한 줄이는 것뿐이었다. 팔로 머리를 감싸고, 무릎을 가슴까지 올리고 웅크리고. 익숙했다. 배보다는 등이 덜 아팠고, 얼굴보다는 엉덩이가 덜 아프다. 걷어차이는 것보다, 깔려서 밟히는 게 덜 아프기도 하다.
“허억......”
익숙해서 그런지, 코트가 기적적으로 쿠션 역할을 한 것인지, 그 이후 수십 번 이어진 박대표의 발길질은 그리 아프지 않았다. 다만 처음 맞은 머리가 아직도 아팠고, 현석과 한서아씨, 그리고 박대표에게까지 얻어맞은 배 때문에 계속 기침이 올라왔을 뿐이었다.
“이 씹새, 이 새끼......!”
곧 박대표가 헉헉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감쌌던 손을 천천히 풀자 그의 숨소리가 더 잘들렸다. 슬쩍 눈만 들어서 그를 보니, 그는 계단의 난간을 붙잡고 서서 자신의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거, 씨...... 라이터, 라이터!”
그리고 그는 곧바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갑자기 계단 아래쪽을 바라보고는 동작을 멈췄다. 고르던 숨도 멈추고 그렇게 한참을 내려다보던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서 후다닥 계단 아래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익......!”
웅크렸던 몸을 풀고 겨우 겨우 몸을 일으켰다. 배는 아직도 욱신거렸고, 얼굴의 반쪽은 꼭 몇 배로 부어오른 것처럼 얼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눈 앞에서 도망가려는 인간을 놓칠 수는 없었다!
“어디가.....!”
“우아아아악!”
순간이동으로 곧장 그의 등 뒤에 매달리자마자 박대표와 나는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코트 자락 사이로 삐져나온 무릎이 계단에 부딪히며 깨질 듯이 아파왔고, 공처럼 튕긴 뒤통수는 다시 한 번 머리를 띵하게 만들었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다시 일으켰다.
“야 이 새끼야!”
“커억!”
다시 한 번 박 대표의 발길질이 가슴팍에 꽂혔다. 그냥 배 나온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박대표는 싸움을 잘했다......!
“뭣도 아닌 새끼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다시 한 번 그의 주먹이 턱을 후려쳤다. 이제 겨우 일어날 수 있나 싶었는데 나는 이제 공장 바닥에서 한 바퀴를 구르고 있었다.
“왜 지랄이야, 지랄이, 어?!!”
“큭.....!”
또 다시 여러번의 발길질이 내 위로 내리찍혔다. 아무리 해도 맞는 건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그저 덜 아픈 노하우가 생길 뿐이지......!
땡그랑-
“?!”
박 대표의 발길질이 멈췄다.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쌌던 손을 풀고 그의 눈을 따라가자, 아까 왜소한 남자에게서 뺏었던 라이터가 떨어져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안 돼......!”
“이익!!”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대표와 나는 동시에 라이터로 뛰어들었다. 간발의 차로 그가 먼저 붙잡았지만, 나는 그 사이 엎드린 그의 위에 올라타서 양 팔을 꽉 붙잡았다.
“비켜, 이 새끼야!!”
그렇게 바닥에서 서로의 손목을 붙잡고 구르기를 또 몇 바퀴, 그는 다시 한 번 내 위에 쉽게 올라탔다.
“이익......!”
하지만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겨우 막았는데, 겨우 붙잡았는데!
“이거 놔, 놔 이 새끼야......!”
처절한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내 위에 올라타서 어떻게든 내 손을 뿌리치려는 그는, 이를 악물고 나를 내려다보며 팔을 휘젓고 있었다. 그나마 내가 손목을 잡지 않았더라면 그는 몇 번이고 파운딩을 내려찍었을 기세였다.
“윽......!”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싸움과 연이 없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아까 전부터 얻어맞았던 구석들과 계단이 구르면서 부딪힌 몸이 구석구석 아리고 저렸다. 이미 있는 힘을 다 쥐어짜내서 박대표를 붙잡고 있었지만, 힘이 빠지는 카운트다운을 하는 것처럼 양 팔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넌..... 뒤졌다!”
“으극......윽.....!”
“누가 보냈는지는 몰라도, 넌 나 못 잡아, 이 새끼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박대표를 붙잡아야해, 증거물은 태우지 못하게 해야 해! 이 상황에서 뭘 해야 하는 건데!
“어?”
복잡한 문제의 답은 때론 단순한 법이다. 있었다. 그를 붙잡으면서 증거물도 안전하게 지킬 방법이. 나는 박대표의 팔을 놓고 곧바로 공장 바닥의 흙을 그의 얼굴에 뿌렸다.
“이게......!”
그리고 두 팔로 그를 끌어안은 뒤, 사무실로 향하는 계단의 맨 위로 순간이동했다.
“으억!”
싸워서 이길 기술, 박대표를 제압할 힘, 그 무엇도 내게는 없었다. 내게 남은 건 마지막 남은 악 뿐이고, 그리고 그 정도면 - 그를 안고 바닥에 구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이익......!”
“뭐하는 거야, 이 새끼야!”
철벅 -
그 소리면 충분했다. 곧장 휘발유의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옷 바깥으로 기름이 질척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휘발유 냄새에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그건 어느새 굴러서 다시 내 위에 올라탄 박대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온통 기름에 젖은 정장차림으로 나를 깔고 엎드려서는,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헛구역질을 하며 버티고 있었다.
“우욱, 우엑......! 이 새끼가 어느 틈에!”
“하아, 하아...... 해 봐.”
“뭐?”
“하려던 거 해보라고, 이 새끼야......!”
박대표는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뚜껑이 덮힌 라이터가 그의 손에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과 팔에도 휘발유는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콜록, 콜록!”
온 몸에서 전해지는 고통과 기름 냄새때문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만 박대표가 떨리는 손으로 라이터 뚜껑에 엄지손가락을 걸치는 건 볼 수 있었다.
“.......이익......!”
그리고 그가 체념하듯 자신의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는 것도 보였다.
“하아, 하아...... 콜록!”
“이 지겨운 새끼가......!”
박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그는 멍한 눈으로 나와 사무실을 번갈아 쳐다보기만을 반복했다.
“이익...... 아무도 없냐, 어?!”
그리고 힘겹게 소리를 질렀지만 공장은 조용했다. 그러고보니 조용할 리가 없는데, 아까 분명히 그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한서아씨를 잡으려고 전부 나왔었는데?
나는 그제야 겨우 상체를 일으키고 계단 아래로 눈을 돌렸다.
“하아, 하아.......”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불과 몇 초전과 사뭇 달라진 공장의 풍경이었다. 몇 개의 전구 밖에는 빛이 없었던 곳이었는데, 이제 그 전구마저 한 개를 제외하고는 전부 깨져있었다. 그런데도 어둡지 않다고 느끼는 건 아마 부서진 벽과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 때문인 듯 했다. 아까 한서아씨가 들어온 곳은 진작에 무너져 있긴 했지만, 그런 커다란 구멍이 세 개정도 더 뚫려 있었다. 벽만 뚫린 게 아니었다. 천장에 가까운 높이에 한 줄로 주르륵 닫혀있던 창문은 전부 깨져서 바깥 공기를 시원하게 안으로 들이고 있었다.
“하아, 하아......”
그리고 그 풍경을 가장 이질적으로 만든 건 역시나 사람들이었다. 그 깨진 창문틀 위에 빨래처럼 여러 명이 널려있는가 하면, 텅 빈 공장 바닥에도 누가 입다 벗어놓은 옷처럼 수십 명이 널브러져 있었다. 여러 명이 샌드위치 놀이를 할 때처럼 쌓여있기도 했고, 따로따로 여기저기 널브러진 사람들도 있었고. 흡사 전쟁영화에서 수성전을 할 때 벽 밑에 쌓여있는 시체들처럼, 정장차림으로 나를 둘러싸고 위협했던 사람들은 모두 여기저기 누워서 꼼짝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다들 신음소리를 내면서 팔다리를 꿈틀거리고 있었다는 점.
그렇다. 불과 얼마 전에는 그들에게서 살아남으면 다행이었는데, 이제는 그들의 생명이 붙어있는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내가 박대표에게 얻어 맞고 구르는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있는 공간은 도저히 앞 뒤 맥락을 미루어 볼 때 예상할 수 있는 그림이 아니었다.
이 처참한 풍경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한서아씨였다. 아무렇지 않게 계단을 걸어올라와서는, 나와 박만기 대표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긴 머리를 어깨 너머로 정리하고 있는 여인.
“어유, 냄새. 얼마나 쏟아부은 거야?”
몇 번 머리를 뒤로 넘긴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가죽 자켓을 툭툭 털었다. 유일하게 안 깨지고 남아있는 전등 아래, 깨진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달빛 아래에서, 그녀는 상처 하나 없는 깔끔한 몸으로 나를 돌아보고는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다.
“이 새끼한테 볼 일 있는 거 아냐?”
“아, 아, 네. 맞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는 한서아씨에게 천천히 발을 옮겼다. 그 짧은 순간에도 주위에서는 신음소리, 돌가루가 이리저리 튀는 소리, 벽이 무너지는 소리같은 작은 소음들이 들려왔다. 당장 무슨 감정을 느껴야하는 건지 아리송했다. 그녀가 나타나기 전까지 날 지배했던 두려움이 조금이나마 사그라드는 듯 했는데, 지금은......
아니지,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이 여자를 제일 무서워해야하는 거 아니야?
“빨리 볼일 봐야지, 그럼. 너 오늘 시간 없잖아. 안 그래?”
내가 발을 끌며 다가가자, 한서아씨는 내가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을 했다.
윙크.
우와, 우와. 그냥 그런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예쁘다, 아름답다, 그런 순간에도 느껴진 경이로움에 칭찬을 건네는 것도 그녀에게는 실례가 될까봐, 자칫 잘못하다가는 내가 사방에 퍼질러 누워있는 정장차림의 남자들과 똑같은 꼴이 될까봐.
나는 곧, 한서아씨와 함께 박 대표의 앞에 나란히 섰다.
“너, 너 뭐야? 너 어디 소속이야?”
세상에, 이 꼴을 보고도 저렇게 큰 소리를 칠 수 있다니. 어따ᅠ갛게 보면 사업가라는 양반들은 대단한 사람들이다. 사람의 주먹질에 벽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날아가고, 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힘을 보여줬는데 그 사람한테도 이렇게 바득바득 대들 수 있다니, 보통의 담력으로는 안 되는 일이다.
“너희 둘 다 사람 친 거야, 어? 가만 있어, 내가 경찰을 좀 알거든? 전화 한 통이면......!”
“하, 나 진짜, 이 새끼.”
그녀는 거침이 없었다. 곧바로 뚜벅뚜벅 걸어간 뒤, 한 손으로 멱살을 잡고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컥, 커헉......!”
박 대표가 그녀의 한 손에 매달려서 버둥거리는 사이, 한서아씨는 그를 붙잡은 채로 공중에서 몇 번 흔든 뒤에 가차없이 내던졌다. 다행히 앞서 날라다닌 사람들보다는 그나마 인간적인 대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바닥에서 몇 바퀴를 구른 뒤에 뒤통수로 벽에 부딪히고 나서야 멈췄다.
“커헉......”
나는 다시 박대표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래, 상황은 상황이고. 일단은 집중할 때다. 내가 원래 하려고 했던 것, 갑자기 끼어든 남자들이 아니었다면 하려고 했던 걸 하자.
박대표는 누워있다가 뒤통수를 부여잡은 채로 겨우 상체만 일으켜 앉았다. 그제야 상황파악이 된 듯, 그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나와 한서아씨를 번갈아 쳐다보며 앉은 채로 뒤로 기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의 뒤가 하필이면 벽으로 막혀있어서 그는 벽에 등을 바싹 붙인 채 앉아야만 했다.
“박만기씨.”
나는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여기저기 맞은 것처럼 다리가 욱신거리고 아파왔지만, 나는 그 자세에서 꾹 참고 그의 눈을 마주봤다.
“아까 그랬지? 인생인 전쟁이다. 착하게, 이상적으로 지킬 거 지키면서 살아봤자 손해만 본다고.”
“......”
“그래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좀 살만해지지 않겠어?”
박만기의 눈빛은 전과 똑같았다. 한서아씨 때문에 겁에 질려있었을 뿐, 그의 눈에 담긴 뜻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는 대답할 것이다.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선택지가 무궁무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니까. 나는 앉은 채로 핸드폰을 켜서 박 대표에게 내밀었다.
“사과하세요.”
그의 눈이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