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인생의 적당한 웨딩일기 1. 프로포즈

평범한 직장인의 적당한 웨딩일기.

by 봄단풍

"결혼해줄래?"


적당하다. 정도에 알맞거나 요령이 있다. 누군가는 등장 자체만으로도 어려움을 느끼는 단어지만, 돌아보건대 내 삶은 늘 그래왔다. 적당하게, 부담스럽지 않게, 큰 무리를 하지 않으면서 대단한 도전도 하지 않고, 덕분에 무릎을 꿇을만한 절망이나 실패를 느껴본 적도 없고. 왜 그러냐하면 사실은 겁이 많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요, 그 '적당한 삶'을 영위하기에도 나같은 사람은 매일같이 달리는 기분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두번째 이유다.


부끄럽다는 이유에서 앞뒤 다 짤라먹고 당장 저 말만 프로포즈 문구라고 올려놓은 이유도 그러하다. 그게 적당하니까. 굳이 그 앞에 어떤 생각을 해서 어떤 말을 덧붙였는지 설명하는 건 구차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혹은 속 빈 강정처럼 보이진 않을까, 걱정도 들어서였다.


하지만 인생은 그리 녹록치 않다. 그렇게 살던 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십 수년, 혹은 수십 년 동안 갈고 닦은 열쇠로 열리지 않는 문을 던져주기도 하며, 불꽃 같은 반사신경과 임기응변에 방청객처럼 박수만 쳐주지도 않는다. 그런가 하면, 오히려 내가 나서서 나 자신을 새롭게 정의하는 계기를 툭- 하니 던져주기도 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운명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인연이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도 하고, 누군가는 하늘에서 내려준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결심까지 십 수년이 걸리기도 하고, 누군가는 눈과 눈 사이에서 광채가 번뜩이는 순간 결정을 지어버리기도 하고.


그런 사람.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결심, 그런 결심을 하게 하는 사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동안 알고 지내던 편한 사이에서 불씨를 발견해냈고, 순식간에 타올랐으며, 적당한 시기에 그렇게 평생을 함께해야겠다는 결심을 갖게 됐다.


지금까지 서른 두 해 살아온 나는 그렇게 이야기를 마쳐야했다.

그렇게 됐다. 끝.

아니면 결혼하자, 끝.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계기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법이다.


"항상 인생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어.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어떤 상황에서는 어떻게, 저 상황에서는 저렇게. 내가 하는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몇 점을 받는지 생각하면서 살았고, 게임을 하면서도 최고의 공략이 뭔지만 생각하면서 살아왔어. 그런 걸 잘했으니까. 좋은 점수를 받고 뿌듯해하고, 나쁜 점수를 받으면 왜 그랬는지 분석한 다음에, 기어코 나중에는 좋은 점수를 받아서 더 박수를 받고. 그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어. 당신을 만나면서도 걱정했었어."


숨을 고르고 침을 삼켰다. 적당히 준비해둔 편지가 있었지만, 나는 그 날 따라 편지를 외우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냥 적당히 보고 읽어도 됐고, 적당히 그 편지를 당신의 두 손에 쥐어줬어도 될 일이지만, 나는 굳이 머리 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해보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게임 얘기를 한다면서, 쿡쿡 웃고 싶은 걸 꾹 참는 당신의 얼굴은 나를 적잖이 당황시키긴 했었다.


"당신을 만나고 나서도 늘 당신의 마음 속에 백점으로 남고 싶었어. 왜냐하면, 백점이 아니면 그 감점이 쌓이고 쌓여서 당신이 헤어지자고 할까봐 무서웠거든. 아니면, 헤어지진 않더라도 당신의 마음에 그 감점들이 남아있을까봐 무서웠어. 그런데....... 그런데, 당신을 만나고 그 생각이 바뀌었어."


당신은 이 때 쯤 웃는 것인지, 울음을 참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하는 말에 고개를 저으면서 용기를 주고 있었다. 그래, 분명히 그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당신의 얼굴에 나는 용기를 얻어서, 침을 꼴깍 삼키고 말을 이어나갔다.


"나를 평가하는 게 아니라 사랑해준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됐고, 그 덕분에 더 자연스럽고, 더 진정한 내가 어떤 모습인지 찾을 수 있었어. 그리고 그런 모습에도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고, 가점도 있고 감점도 있겠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았지. 아니,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니라 중요하긴 한데, 그....... 이게 어떤 모습이든 당신에게 상처를 줘선 안 되고, 당연히 그건 뺀 의미긴 한데......."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꼭 중요한 타이밍에 횡설수설하게 되는 법이다. 나는 얼른 고개를 휘휘 젓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모습이 어떻든,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나도 당신을 사랑할 거라는 확신을 얻었어. 당신만 괜찮다면, 당신에게도 확신을 주고, 지금 내가 느끼는 확신과 사랑을 당신도 평생 함께 느끼게 해주고 싶어. 그런 생각을 했어. 그러니까, 쿼카야."


이미 반지와 꽃다발, LED촛불과 풍선은 넘치도록 방 안에 쌓여있었다.

더 필요한 것은 없었다. 준비는 끝났고, 나는 마지막 출발선에 무릎을 꿇고 당신을 올려다봤다.


"결혼해줄래?"


당신은 웃었고, 눈에는 눈물이 살짝 보였다.

토이스토리 3을 보고도 냉정하게 내 눈물을 보면서 웃던 당신은,

그 때 만큼은 슬쩍 눈물을 머금은 채로 웃으면서 내 손을 잡았다.


더 필요한 것은 없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래. 적어도 그 때까지는 더 필요한 것은 없었다.

필요한 것을 챙기고 준비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부터 시작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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