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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단풍 Jun 11. 2022

퇴고 없이 쓰는 글.

서문


나는 글을 쓸 때, 한 번 써놓은 글을 여러 번 고쳐서 다시 쓰는 편이다. 첫째로 내게는 한 번에 멋진 글을 뽑아낼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둘째로 더 나은 문장으로 다듬는 과정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데 글을 고치고 다듬으려면, 처음에 써놓은 문장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어찌되었든 일단 글을 대충이라도 써서 던져놔야만 하는데, 여기서 글을 쓸 때 첫 번째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 쓰고 싶은 글이 떠올라도 자꾸만 먼저 고치고 싶어서, 정작 머릿속의 글을 뱉어놓지 못하게 되는 것. 


그래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생각들을 뱉어놓으면 그 와중에 건질만한 것들이 눈에 보이고, 그걸 또 몇 번에 걸쳐서 다듬고 다듬고 다듬다보면 그나마 또 읽어줄만하게 깎이곤 한다.


사실 모든 일이 그렇다. 음악을 만들든, 그림을 그리든, 하다못해 회사에서 결재문을 쓰거나 친구에게 줄 선물을 고르거나 하는 모든 일이, 처음 뱉어놓은 것보다는 시간을 두고 고치고 고치고 고치다보면 괜찮아지곤 하는 것이지. 


어디에나 붙는 비유라 식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내 인생도 그런 편이었다. 호되게 혼나고, 스스로 부끄러울 일도 행하다 보면, 다른 건 다 잊어도 꼭 그런 일들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덕에 더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하지만, 이라고 하고 화제를 전환하면 아마 글쓰기를 가르치는 강사님들이나 교수님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굳이 그렇게 또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하지만. 고치고 다듬고, 때빼고 광내는 작업을 거치기 전의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들이 더 끌리는 때도 있는 법이다.


고치면서 문장이 더 유려해졌을지언정, 처음에 내가 내고 싶었던 느낌을 잃어버리고, 잊어버리는 경우도 허다했던 것이다. 진흙에 파묻힌 다이아몬드를 발견해서 반지를 만들어야지, 하고 깎다가 엄청나게 날렵하고 뾰족한 화살촉을 만들어버리는 경우. 


세상사가 그런 법이다. 이게 좋을 때가 있는가 하면 저게 더 나아보일 때가 있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어느 쪽을 택할지 고르고 싶은데 정작 그 상황이 오면 그걸 구분할 정신이 없기도 하고.


아마 보통의 책이나 글이었다면, 이제부터 그런 상황을 구분하는 법을 가르쳐드리겠다는 호언장담이 있었겠지만, 내게는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럴 의사도 없다. 다만, 고치고 다듬는 건 평소에도 많이들 하고 있으니, 이번에는 그런 작업 없이 머릿 속의 돌덩이들을 한 번 꺼내볼 작정이다.


이것저것 꺼내놓다보면 아마 깨닫겠지, 아, 이래서 다듬어야 하는구나, 하고. 그럼에도 퇴고 없이 글을 써보겠다는 건 일종의 몸부림이다. 혹시. 혹시라도, 하나씩 그렇게 꺼내 놓다보면, 다듬는 것보다 그대로 두는 것이 훨씬 아름다운 보석을 한 번쯤은 꺼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실은 이것도 핑계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글의 초입에서 언급했듯이 ‘고치기 전에 일단 꺼내놓는 연습’을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래도, 인생은 ‘혹시 몰라’ 라는 실낱같은 가능성에 기대야 살만해지는 법. 그러다보면 전혀 새로운 차원의 문이 열릴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아주 작은 가능성의 기적이 이루어지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릴 수도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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