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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단풍 Jul 26. 2022

5. 혼자 발톱을 깎는 건.

퇴고없이 쓰는 글


혼자 발톱을 깎는 건 어려운 일이다.


발톱을 깎는 것은 손톱을 깎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주의를 요한다. 깔끔하고 싶다는 이유로 가장자리를 너무 깨끗하게 깎아내면, 나중에 내성발톱이 되어 생고생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흰 부분을 많이 남기자니 애초에 발톱을 깨끗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많이 벗어나게 된다. 가장자리는 남기면서 흰부분을 깎자니, 깔끔하게 발톱 조각을 수거할 수 있는 각도를 내기가 힘들다.


그렇게 겨우 예쁜 각도를 찾아서 발톱을 다듬다보면, 나도 모르게 조금 더, 조금 더 깎다가 발톱 아래 살을 건드리기 일쑤다. 이미 너무 짧아져버린 발톱과 그 아래 삐져나온 살에게, ‘미안, 깨끗하게 하고 싶어서 그랬어’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문답무용,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감각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찌릿한 통증이 변명에 대한 대답을 대신한다.


그리고 다른 것보다도, 애초에 혼자 깎기가 힘들다. 의자에 앉아서 하자니 발톱이 너무 멀고, 받침대를 가져다 쓰자니 골반이 아프다. 골반만 아프면 괜찮을텐데 나이가 들수록 배가 나오니 발톱에 손이 닿도록 무릎을 굽히는 것도 점점 힘들어진다. 아직은 적당히 숨 참고 굽히면 발톱이 손에 닿는다 하더라도, 눈으로 발톱의 모양을 잘 보면서 세세하게 다듬는 건 또 그 이상의 넘어야 할 언덕이 되어버린다.


그럼에도 발톱은 수시로 깎아야한다. 금이 가거나 부러지기라도 하면 이걸 떼어내야 하나, 자라날 때까지 덜렁덜렁 붙이고 다녀야 하나, 하는 고민부터 시작해서, 자다가도 뜨끔하는 고통에 깨어나야할지도 모른다. 또, 출근할 때 꽉 끼는 구두라도 신었다 하면 나중에 한 발가락에서 쌍둥이로 자라는 발톱을 구경하게 될 수도 있고, 여름에 시원하게 다니려고 샀던 덧신에 숨구멍이 뚫리게 될 수도 있다. 집에서 같이 지내는 사람의 몸에 의도치않은 생채기라도 나면 미안함과 자괴감에 정신적으로도 고통을 받게 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그에 반해, 임신한 아내의 발톱을 대신 깎아주는 건 훨씬 쉬운 일이다.


내 손톱을 깎는 것보다도 쉬운 것이, 양 손이 자유로운 덕분에 아내의 발가락을 내게 편한 자세로 고쳐잡을 수가 있다. 눈을 바로 발톱 앞까지 가져가서 세세하게 훑어볼 수 있는 건 덤. 물론 자세하게 보지 말라는 아내의 불호령이 떨어지면 다시 고개를 들어야하지만, 업무의 시작이자 가장 중요한 단계인 세팅이 수월하니, 그 이후의 작업이 수월해지는 건 말하나마나 한 일이다.


“다듬기까지 해?”

“이거 튀어나와서 안 돼. 나중에 분명히 걸려.”


그러다보니 마음에 우러나오는 추가 서비스도 자연스럽다. 내가 내 발톱을 자를 때는 보이지 않던 자그마한 흠결도 볼 수 있으니, 고객님의 안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추가 작업도 무리없이 진행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러고보면 발이란 건 꽤나 역설적인 신체부위다. 


우리는 발을 통해 세상으로 나아간다. 길을 걷고, 나아가서, 새로운 곳을 탐험하고 개척하며, 목적지로 마음 먹은 곳에 조금씩 다가간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궁극적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험한 길을 거쳐 다른 사람에게 나아가는 발은 그 끝에 달린 몇 조각의 발톱으로 걷지 못할 지경에 이르기도 하는데, 그렇게 발의 컨디션을 좌우하는 자그마한 발톱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다듬어야 훨씬 편하게 관리할 수 있으니. 그리고 그렇게 내 자신의 발톱을 쉽게 관리하는 방법은 대화의 방법과도 같으며, 관계를 정립하는 방법과도 비슷하며, 나아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그 방법이라함은, 내가 먼저 허리를 숙이고 다른 사람의 발톱을 다듬어 주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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