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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퇴직유랑기 #17. 하이드 파크

겁많은 퇴직자의 유럽 5개국 8도시 여행기

by 봄단풍

의식의 흐름, 생각이 퍼져나가는 속도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을 때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세웠다. 한 번 불붙은 잔디가 얼마나 빨리 타오르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가 더 많이 오기 전에 공원을 조금 더 둘러보고자 점점 아파오는 발이 닿는 곳을 따라 움직였다. 리젠트 공원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컸다. 길을 가도 분기점이 두 세 개씩 나왔고, 어느 쪽을 가도 금방 끝이 나는 길이 없었다. 그리고 어느 길을 가도, 잔디밭에는 늘 새들이 걸어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쯤에 마침내 발이 엄청나게 아파왔다. 아무래도 하루 종일 대중교통을 한 번도 이용하지 않고 걸어다닌 탓에 발에 무리가 온 듯 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아침과 저녁을 챙겨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왔기 때문에 저녁 일곱시까지는 가야했는데, 어기적어기적 또 걸어서 게스트하우스에 가보니 다행히 비슷한 시간 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흰 쌀밥에 제육볶음 등 다소 한국적인, 그래서 신기했던 식사 후에 나는 무리하지 않고 숙소에서 쉬기로 결정했다.


생각해보면 큰일이다. 한 달 중에 이제 고작 첫 날인데 벌써 발이 아파오다니. 휴족시간이나 그 흔한 파스 한 장 가져오지 않은 게 너무나도 후회됐다! 생각해보면 지레 겁을 많이 먹었던 것 같다. 지하철 한복판에서 흑인들에게 돈을 뜯겼다느니, 혹은 소매치기를 당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너무 많이 들어서……. 그래도 일찍 자면 발도 일찍 낫겠지.


문득 두려웠다. 밤의 낯선 거리도 두려웠고, 이 시간을 내가 온전히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두려웠다. 과연, 노후가 보장되는 대기업을 1년만에 퇴직하고, 이곳에 온 나의 판단은 맞았던 걸까? 앞으로 한 달동안의 여행에서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마지막에는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 * *


시차에 대한 걱정이 많았지만, 다행스럽게도 다음날 아침에는 여섯시에 눈이 떠졌다. 런던에서 맞는 두 번째 아침. 익숙함보다 아직은 설렘이 더 컸다. 더군다나, 빗소리를 들으며 눈을 뜨는 경험은 언제라도 기분 좋은 일이기도 했다. 우박마냥 우산과 지붕을 쿵쿵 두드리는 비가 아닌, 샤워기를 분사로 놓고 쬘 때처럼 쏴아아 소리가 들릴 듯 말 듯하게 뿌려지는 기분 좋은 비.

물론 여행자의 입장이 아닐 때의 이야기다.


런던에 도착할 때도, 첫 날 돌아다닐 때도 비가 오더니 이제는 아예 아침부터 퍼붓는구나. 세상에……. 그나마 어제는 박물관이나 가게처럼 실내에서 돌아다니는 곳을 갔었고, 오늘 가기로 한 곳도 오랜시간 내부에 있을 예정이라 다행이긴 했지만 못내 약이 올랐다. 런던에 고작 4일 있을 예정인데 3일 내내 비가 오다니! 어쩌면 오후에 그칠지도 모르지만, 그러길 바라지만…….


그럼에도 아침 식사는 참 기분 좋게 마쳤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제공되는 토스트와 간단한 과일들을 먹고, 씻고 나니 얼른 당장이라도 밖에 나가고 싶었다. 저 빗속에 내 두 벌뿐인 바지가 젖어도 좋으니 나를 던지고 싶어라……. 다만, 어제 무리한 발이 아침까지 쑤셨기 때문에 조금 쉬었다가 나가보기로 했다. 운동화를 챙겨올 걸. 가져온 신발 두 켤레 모두 밑창이 평평하고 깔창도 얇은 신발이었기에 오랫동안 걷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듯 했다.


오늘의 일정은 간단했다. 오전에는 런던을 한 번 더 돌아보고, 점심을 먹은 뒤에 게스트하우스에서 첫 날 인사했던 동생과 함께 해리포터 박물관을 가기로 했다. 어차피 내일 점심에 파리로 넘어갈 예정이라, 해리포터 박물관에서 못 다한 쇼핑을 다 할 작정이었다. 3박 4일에 250파운드 정도를 환전해왔는데 첫날 쇼핑을 거의 안한 터라 아무래도 여유가 있었다.


오전 열시, 빗발이 조금 약해졌을 때 쯤 나는 작은 삼단우산을 하나 챙겨서 밖으로 나섰다. 한시경 만나기로 한 터라 시간이 여유있는 편은 아니어서, 나는 어제 가보지 못했던 하이드 파크를 가보기로 했다. 가는 길에 못 가본 런던 시내도 구경하고, 가서는 이런저런 생각을 좀 하다가 올 요량이었다.


하이드 파크는 멀리있지 않았다! 숙소에서 걸어서 삼 사십분 정도. 단순히 공원 면적으로만 보면 리젠트 파크보다 더 커보였다. 들어가자마자 커다란 잔디밭이 나왔는데, 축구장 대여섯개 쯤을 합쳐놓은 듯한 크기였다. 커다란 잔디밭에 낙서를 하듯 길이 그려져 있었고 어느 정도 안으로 들어가기 까지는 나무 한 그루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날이 흐리고 비가 오는 것이 다행인지도 몰랐다. 해가 쨍쨍했다면 난 지금보다 한 층 더 까매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이드 파크는 리젠트 파크와 약간 달랐다. 둘 다 꽤 넓고, 커다란 호수를 품고 있다는 건 비슷했지만, 리젠트 파크는 숲 속에서 길이 여러갈래 갈라지며 다양한 건물들이 있었던 반면 하이드파크는 숲 속에서도 건물이나 나무들 사이의 간격이 좀 더 넓었다. 동상들도 보였고, 제복을 입고 줄지어 말을 타는 사람도 보였고. 길 자체도 어쩐지 더 넓게 느껴졌다! 뭣보다, 건대 호수마냥 하이드파크의 호수에는 가운데에 섬 비슷한 것이 있었는데 아마 그곳이 다양한 새들의 집인 듯 했다.





그리고 새들이 리젠트보다 다양했다! 오리는 물론이요 백조와 흑조, 그리고 이름 모를 다양한 아이들까지. 걷기 좋게 직선으로 정비해놓은 호수 덕에 어쩐지 길을 걷다보면 동물원에 와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걷다보면 호수의 풍경과 함께, 물가에 앉아있는 녀석들도 바뀌고. 허나 빵조각을 던져주면 어디선가 순식간에 날아들고.

그걸 겨냥한 것인지 호수 한 구석에 커다란 카페도 차려져 있었다. 테라스는 호수에 닿아있어서 편하게 차를 마시면서 새들이 몰려드는 걸 구경할 수도 있었고, 몰려들게 만들 수도 있었다. 비가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테라스 자리는 물론 안쪽 자리까지 거의 꽉 차 있었기에, 나는 여유를 즐기는 대신 구경하면서 지나치기로 했다. 정말, 이 사람들의 여유와 커피에 대한 갈망은 대단한 듯 했다. 평일 오전 공원 카페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라니!




생각해봤다. 셰익스피어, 해리포터, 셜록 홈즈, 반지의 제왕, 전 세계인을 감동시키고 또 흥분하게 하는 명작들이 나온 배경이 뭘까? 이들에게는 여유가 존재해서? 이들은 여유에 대해 관대하고, 우리나라만큼 휴식을 죄악으로 여기지 않아서? 아니면 그저 전반적으로 다들 살기 부유해서 이런 여유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대영제국 시절의 영향력이 아직도 남아있어서 이들의 코드가 타 문화권에서도 비교적 익숙하게 먹히는 것일까?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하다보니 가끔 생각이 극단적으로 가는 것도 같았다. 비 때문에 짜증이 늘어서거나. 이미 촉촉이 젖은 발을 억지로 옮겨서 공원 밖으로 몸을 돌렸다. 이래저래 신기한 런던의 거리 곳곳을 지나쳐, 해리포터 스튜디오에 가기 위해 킹스크로스 역으로 향했다. 전전날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났던 분과 함께 가기로 했던 터라, 주위를 잘 살피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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