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꿈

이별, 그리고 그 후.

by 봄단풍

그 해 여름은 유독 짧았다. 무더위는 몇 번 오고간 장마와 함께 사그라들었고, 저녁 공기는 금세 쌀쌀해졌다. 낮에는 땀범벅이 된 옷을 입고, 저녁에는 오들오들 떨며 집으로 향하던 날이 며칠 지나간 이후. 나는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그녀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그만하자, 우리.”


 따뜻한 코코아가 담긴 머그컵, 얼음 담긴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그녀는 그렇게 말을 꺼냈다. 나지막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한 목소리로, 탁자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어느 때보다도 확신에 찬 눈으로. 평소였으면 킥킥거리며 마주봤을 그 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겨우 창밖으로 눈을 옮겼다.


가로등 환한 거리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미리 챙겨오지 못한 우산이 생각나 한숨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아침 뉴스, 흐린 하늘, 습기 가득해 꿉꿉했던 출근길 공기, 지하철 곳곳에서 대롱대롱 흔들리던 장우산들. 미리 준비할 만도 했건만 왜인지 내 가방에서는 우산을 찾아볼 수 없었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한참이나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겨우 허세를 부려본다. 사실 정말 후회없는 선택을 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더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왜 대답은 하지 않니, 너도 나처럼 목이 메어오니, 아니면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니?


“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아침에 하늘이 구름 가득한데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면 그건 그 사람의 잘못인 거다. 짧아진 인사, 귀찮아진 연락, 잡던 손마저 부담스럽다고 내던지던 모습. 칭찬과 위로보다 한숨과 질책이 늘어갈 때 미리 준비했어야 했다. 평소에 그렇게도 좋아했던 따뜻한 코코아를 한 모금 홀짝였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도 없는데 서로 붙잡고 있는 건 시간낭비같아.”


울컥, 화가 치솟았지만 입 밖으로는 한 마디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너는 마음이 없었구나. 언제부터? 그럼 나는? 그렇게 몇 분이 지나도록 새로이 생겨나는 질문들이 그러하듯, 코코아는 줄어들 생각이 없었다. 지금 내 앞에 놓여있는 게 설령 사랑의 묘약이라 한들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시면 체할 것만 같았다.


“어떻게 생각해?”


답을 다 정해놓고 굳이 내 의견을 묻는 건 무슨 뜻일까? 사실은 이 모든 게 내 마음과 태도를 처음으로 되돌리려는 너의 시도인 거야? 이미 길을 정했으니 내가 뭐라 말하든 결과는 바뀌는 게 없을 거라고 말하려는 거니?


잠시 눈을 내려 탁자 위를 바라봤다. 밝은 분홍빛의 히비스커스 티도 줄어들 생각 없이 반짝거렸다. 속이 비치는 투명한 플라스틱 잔에는 물방울이 송글송글. 한참 바라보고 있자니 또르륵, 멋대로 굴러 떨어졌다. 그 모습을 눈에 담기 부담스러워 나는 얼른 눈을 돌렸다.


이 카페도 둘이 자주 오던 곳이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구석자리를 찾아다니고, 행여 사람들이 먼저 자리를 잡을까 주문하기도 전에 가방부터 내려놓기 바빴었다. 같이 책도 읽고, 손잡고 멍하니 몇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그 밝은 미소가 그리울 땐 마주앉았다가, 따뜻한 손길이 그리울 땐 나란히 앉았다가…….


두 눈이 한 번 깜빡였다. 아무 말도 없이 그녀는 그렇게 대답을 보챘다. 문득 지금 앉은 곳이 어딘지 궁금해져 주위를 살폈다. 우리는 카페 한 가운데 설치된 기둥 옆에 아무렇게나 앉아있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옆자리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고. 평소라면 시끄럽고 시선도 신경 쓰였을 자리인데 오늘따라 다들 멀게만 느껴졌다. 불편했다. 꼭 내키지 않은 소개팅에 나온 것처럼 뼛속 구석구석 간지러웠다.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나고 싶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일어나면 그 때가 우리의 마지막이 될 거라고.


“그래, 그럼.”


그럼에도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났고, 점점 거세어지는 빗속으로 억지로 발을 옮겼다. 한 끼 식사 값에 준하는 코코아와 차는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부어졌다. 드르륵, 한 가득 얼음 쏟아지는 소리는 먼 하늘에서 울리는 천둥소리 같았다.


“역까지 같이 가자.”


민트색 장우산을 펄럭이며 그녀가 먼저 빗속으로 발을 내밀었다. 늘 그랬듯, 이미 내게 우산이 없는 걸 봐둔 듯했다. 항상 그랬다. 나는 까먹고, 무언가를 잊고 또 잃어버리고, 눈치마저 없었고, 당신은 그런 나를 오래도록 챙겨왔었다. 그녀가 어깨에 펴둔 작은 동그라미 안에 참 많은 장면들이 스쳐지나갔다. 선크림, 도시락, 우산, 넥타이…….


“먼저 가. 난 할 게 있어서.”


마지막으로 그녀가 돌아보았다. 그래, 마지막. 나는 그 모습이 마지막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민트색 우산, 남색 원피스, 가지런히 묶어서 내린 한 가닥의 갈색 머리. 가볍게 오므려진 입술은 가볍게 떨리고, 하얀 팔뚝 끝에는 물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문득 조금 전 차가운 찻잔에 대롱대롱 매달렸던 물방울이 생각났다.


“괜찮겠어?”


진심이 담긴 걱정이 던져졌다. 무표정한 끄덕거림, 별 일 아니라는 듯 주머니에 넣은 손.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남을 내 모습을, 나는 마지막까지 허세로 꽁꽁 감쌌다. 어쩌면 괜찮은지도 몰랐다. 몇 가지 전조들을 보고도 이별은 유추하지 못했지만, 그런 준비성 부족한 나를 내 마음은 나름대로 챙겨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마음도 토닥여 줄 수 있는 하루가 언젠가는 오겠지.


“조심히 가.”


그렇게 그녀는 몸을 돌렸다. 예쁘다 생각했던 머리카락도, 잘 어울린다 생각했던 원피스도, 함께 비비던 촉감까지 기억나는 하얀 피부도 또 입술과 그 입술처럼 물들던 순수한 볼도. 그 모든 것들이, 단 1초도 되지 않는 찰나의 순간 펼쳐진 우산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사라졌다, 영영.


잡아야 했다. 불러야 했다. 잠깐이라도, 일단 시간을 좀 두고 생각해보자고. 내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그녀도 그걸 원했던 걸지도 모르잖아? 그래, 지금은 나도 너도 괜찮겠지, 괜찮은 척 하겠지만 정말 이 선택에 후회를 할지 안 할지 지금 당장 어떻게 확신해?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이 얼만데, 적어도 며칠은 더 고민 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영화 속에서는 빗속에서도 멋진 장면들이 참 많던데. 헤어졌던 연인이 서로를 다시 찾아 끌어안기도 하고,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빗소리에 묻어 외치기도 하고. 혹은 멀리 떠났던 누군가가 비를 타고 돌아오기도 하고, 그 안에서 감동적인 재회를 하기도 하고 말이지.


다만, 내가 주인공인 영화는 그리 재밌지 않았다. 우산을 때리던 빗소리는 차분히 멀어졌고, 민트색 동그라미는 순식간에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오래도록 지켜보고 기억에 남기고 싶었던 뒷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고, 나는 그 뒤에 손가락 하나 내밀 용기조차 내지 못한 채, 하다못해 퍼붓는 빗소리에 목소리 조금 섞어 볼 용기조차 내지 못한 채 우두커니 젖어갈 뿐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던 마음에는 그 날 내린 비가 참 오래도록 더 내려서, 해 뜨는 시간까지 잠 못 들고 이불을 적시는 날이 이어졌다. 왜 세상은 이 느린 마음을 기다려주지 못하는지, 나는 눈앞에 닥쳐오는 일들 때문에 억지로라도 마음을 추스려야 했다. 삶이 일상에 파묻히는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일들을 떠맡았고, 행복해져야 한다는 강박 속에 겨우겨우 흔적들을 지워나갔다.


가장 어려운 일은 첫 일주일에 모두 끝났다. 돌이키고 곱씹을수록 어려워진다는 말에 에라 모르겠다하고 저질러버린 것이다. 한 장도 남김없이, 그녀의 흔적이 남은 사진은 모조리 지웠다. 받았던 선물들은 큰 가방 안에 넣어서 한꺼번에 버렸고, 함께 골랐던 인형들도 그 가방에 담아버렸다. 다만 골라준 옷들, 선크림 등 내가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은 남겨두었다. 난 헤어진 다음에도 참 약아 빠졌다.


하지만 그렇게 남겨둔 물건들 때문인지, 아니면 내다 버린 인형들의 유령이라도 찾아오기 때문인지, 잠자리에만 들면 마음은 꼭 그 첫 날 밤으로 돌아가곤 했다. 아무리 철저하게 치우고, 세상에 파묻히려 노력해도 그 시간만큼은 피할 수가 없었다. 나는 몇 번이고 이불을 움켜쥐고 숨을 참았고, 헤어지던 날 그 붉은 찻잔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을 떠올리며 잠을 설쳤다.


우리가 만났던 그 날 저녁, 그 시간만 달리는 시간축에서 뽑아낼 수 있다면. 책장에서 책을 덜어내듯이 가볍게 뽑아낼 수 있다면,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우산을 같이 쓰고 걸었을까, 벌써부터 그리워지는 두 팔을 엉켜 잡고 발 맞춰 걷고 있었을까? 그냥 그 덜어진 책장 속에, 평소의 저녁을 꽂아둘 순 없을까, 그럼 우리는 지금 예전처럼 함께 있을 수 있을까?


꾸역꾸역 시간은 흘러서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똑같이 밤만 되면 우울해졌지만 더 이상 눈이 촉촉해지진 않았다. 어느덧 마음에는 슬픔보다는 미움이 더 굳건히 자리 잡았다. 함께 할 때도 그랬지만, 끝나는 순간까지 그녀는 자기 마음대로였다. 내가 생각하고, 고민하고 기다리는 사이 우리의 관계는 끝나있었다.


타이밍 좋게 음원 사이트에서는 헤어진 연인에게 행복을 기원하는 노래가 차트의 상위권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프다 행복해줘…….’ 사람들은 순수하게 쓰인 가사에 공감했다고 하지만, 나는 그 가사마저도 가식적이라고 생각했다. 평생 아프고 아파야지, 날 아프게 한만큼 아프고 평생 날 찬 걸 후회해야지. 날 끊어낸 사람의 행복을 빌어준다니 성인군자라도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누구에게도 나쁜 사람이 되기 싫은, 어설프게 착한 이들의 환상이라 생각했다.


“개 연애한다더라.”


흐르는 시간에도 관성이 있는지 어느새 몇 달이 훌쩍 지나있었다. 언제 그걸 깨달았냐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녀의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어느새 그렇게 외부의 자극이 주어지지 않으면 스스로 굳이 그 기억을 떠올리지 않는 지경에 이른 모양이었다. 그 날 이후 그녀는 금세 새 출발을 했다는 소식이었고, 건강히 잘 지낸다는 소식이었다. 좋은 소식인가?


“벌써?”


사실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누구를 만나고 어디에서 지내든 행복하지 않았으면 했고, 날 생각하며 후회하길 바랐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그렇게도 불안했나보다. 누굴 만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굴 만나든 행복할까봐. 물론 그러면서도 그녀가 설령 돌아온다 할지라도 나는 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 없지만 단호한 신념을 지켜가며 스스로 얄팍한 위안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 이후로도 종종 그 사람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다. 그렇다고 애써 외면하거나, 그 얘기를 하는 친구를 나무라거나, 혹은 슬픈 표정으로 괜찮다며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다만 떠오를 때마다 그녀의 불행을 빌었다. 물론 계속 누군가의 불행을 기도하는 것은 나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썩 좋은 일은 아니었다. 다만 억지로 잊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는, 생각날 때마다 화를 내고 또 속 시원한 복수를 꿈꾸는 게 내 삶을 더 살기 좋게 만들어줬다.


“하고 싶은 말은 없어? 만약에 만나게 되면.”


물론 개중에는 꼭 눈치 없는 친구가 있기 마련이다. 겨우 잊어갈 타이밍에 소식을 물어오는 사람, 애써 돌려놓은 화제를 다시 제자리로 맞춰놓는 사람. 그래도 힘들었던 시절에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생각했던 것이어서 나는 금방 대답할 수 있었다.


“두 번 다시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고 나면 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도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던 것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씩 웃어 보이고, 그제야 눈앞의 사람도 따라서 안도의 미소를 지어보이고. 그렇게 나와 내 주변에서 그녀에 대한 흔적은 조금씩 지워졌고, 묻혔고, 바람에 쓸려 날아가듯 얕아졌다. 잠시 머릿속에 떠올라도 횡단보도 앞에 내려앉은 비둘기처럼 금방 날아가곤 했다.


마지막으로 그 사람을 떠올린 건, 헤어졌던 날로부터 일 년하고도 며칠이 더 지난 후였다.


“연애는 몇 번이나 했었어요?”


항상 정장차림, 혹은 비즈니스 룩을 입는 주리씨도 주말에는 청바지를 즐겨 입었다. 몇 번의 비가 내리고 미세먼지도 다 걷혔을 때, 눈은 이미 녹고 저녁 바람도 따뜻하게 느껴질 때쯤. 나와의 세 번째 만남에 청바지와 푸르스름한 남방을 입고 나온 주리씨는 그렇게 물어왔다. 연애는요, 무슨. 아무렇지 않게 흘려 넘기며, 차가운 히비스커스 티를 홀짝였다. 하지만 턱을 괴고 이 쪽을 지그시 바라보는 묵직한 그 눈빛에 나는 솔직하게 대답해야 함을 깨달았다.


“한 번이요.”


그리고 오래 가진 않았어요, 라고 나는 결국 거짓말을 덧붙였다. 아무렇지 않은 듯 차를 한 모금 홀짝. 그 날 따라 몸과 마음의 호흡이 참 잘 맞았다. 흐음, 하며 실눈을 뜨고 쳐다보는 그녀였지만, 다행히 더 물어 오진 않았다.


나는 그 날 밤, 침대에 누워 오랜만에 기억의 책장을 훑었다. 덜어내고 싶던 그 자리에는 이미 먼지가 꽤 쌓인 책이 그대로 꽂혀 있었다. 꽤 아름다웠고, 꽤 행복했었고, 또 나는 그 안에서만큼은 무엇이든 가능한 주인공이었다. 물론 미웠던 사람이 이제 용서가 되고 또 다시 좋아지는 기적은 없었다. 그리고 잠시, 아주 찰나의 순간 그 사람이 어떻게 지내는 지 궁금해졌다.


『그만하자, 우리.』


마지막 날 첫 마디는 아직도 생생했다. 부끄러운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을 때처럼 나는 몸서리를 치며 돌아누웠다. 그렇게 끝났었지. 그 날 나눴던 다른 말들은, 또 모습은 이제 달리는 차창 밖 풍경처럼 희미해져 있었다. 민트색 우산, 남색 원피스. 비가 억수로 왔었고, 갈색 머리카락 옆으로 빗방울이 매달려서 하얀 팔로 똑 떨어졌었고…….


『조심히 들어가.』


지난 일을 돌아보는 건 꼭 고장난 비디오테이프 같았다. 제 멋대로 빨리 감았다가, 느리게 감았다가, 재생했다가. 원치 않은 모습들을 확대했다가, 궁금했던 모습은 희미하게 아웃 포커싱을 해버렸다가. 또 흐려진 장면을 간신히 선명하게 기억해내면, 막상 그 장면은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부끄럽거나 기억하기 싫었던 장면이었다.


『사랑해.』


그런 날이 있었지. 하루 종일 같이 있고 싶었던 마음을 질리도록 표현했던 나날이 있었다. 사랑이란 말을 뱉으면서 정작 그 단어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없었고, 그리고 그 텅 빈 머릿속이 사랑이라 믿었던 시절이었다. 그 믿음 하나로 다른 이들 앞에서 전쟁 영웅처럼 사랑에 대해 설파하던 날들이 있었다.


『보고싶어.』


하루의 마무리를 고백으로 마치던 날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습관이 된 것 같다고 당신은 얘기했었지만, 단 하루도 진심이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오히려 당신이야말로 그 한 두마디 말들을 듣는 것이 습관이 되었던 것인지, 매번 전하던 진심이 벽에 쏘아진 물처럼 의미없이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날들이 많아졌었다.


그리고 기억이 다시 한 번 민트색 우산을 떠올릴 때쯤 나는 다시 불 꺼진 방 안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 전에는 몇 번이고 걷어차서 침대 저 멀리 떨어졌던 이불은 어쩐 일인지 잘 덮여있었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된 것인지, 선명한 기억을 앞에 두고서도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듯 무심히 넘길 수 있게 된 것인지.


무뎌진 것인지, 아니면 더 자란 것인지. 어느 쪽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어느새 그 아픈 기억을 앞에 두고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됐다. 그런 시간도 있었지, 그런 사람도 있었지.


솔직히 아직도 남은 것들이 있다. 그 때의 감정은 이미 시간의 강물에 떠내려갔지만, 앙금처럼 묵직하게 그 바닥에 깔려있는 추억들은 분명 있다. 지금도 간혹 떠오르곤 하지만, 이제 그 날카로운 것들에 베이기에는 그 위로 덮어진 흙이 꽤 많은 모양이었다. 언젠가는 그 가라앉은 것들도 완전히 덮이거나, 흙 속에서 부드럽게 깎이거나, 아니면 그렇게 버티다가 떠내려가겠지.


[내일은 하루 종일 맑대요. 바람 쐬러 갈래요?]


좋아요, 괜찮으면 자전거를 타러 가요. 침대에 누운 채로 나는 웃으며 전화를 끊고,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웃으면서 전화를 마친 건 얼마만인지, 또 약속 있는 주말을 맞이한 건 얼마만인지.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는 하루가 시작되겠지. 큰 기대는 없음에도, 나는 자꾸만 흘러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살며시 입꼬리만 말아 올렸다.


눈을 녹이고 햇빛을 쏘아대고, 미세먼지가 오락가락하다가도 땀을 쥐어짜내던 날씨는 어느덧 시원한 입김을 불고 있었다. 가끔 올려다 본 하늘에 눈이 시리고, 서늘해진 바람을 피해 옷매무새를 가다듬게 되는 날씨, 밤이 되면 몸을 움츠리게 되는 날씨. 바야흐로 가을이었다.



이전 0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