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내 편일 수는 없습니다.
“왜 박차장님은 저를 싫어하실까요?”
열대야도 물러가고, 해가 지면 서늘해진 바람이 정장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어느 가을 밤. 퇴근길에 나는 문득 주리씨에게 그렇게 물었다. 사실 주리씨 앞에서는 항상 어른스러운 모습, 멋있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기에 걱정거리는 털어놓지 않으려 했지만, 간혹 마음이 약해지는 날이 있는 법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주리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렇게 되물었다. 밤 아홉시가 넘은 시간. 인도를 울리는 주리씨와 나의 구두 소리를 들으면서 멍하니 걷던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유독 저한테만 쌀쌀맞으신 걸까요?”
“흐음. 박차장님이 유독 깐깐하긴 한데, 누구 한 사람만 싫어할 분은 아닌 것 같은데.”
주리씨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황급히 말을 이었다.
“물론 수하씨 말을 들어보면 싫어하는 티가 팍팍 나긴 하지만요.”
“그렇죠?”
“혹시 수하씨가 박차장님한테 잘못한 게 있어요?”
“제가요?”
“네. 아니면 박차장님이 오해하신 것이라든지, 어떤 것이든. 박차장님이 수하씨를 싫어할 이유가 있어요?”
나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러고보니, 회사에 들어온 이후 점점 그렇게 느끼기만 했을 뿐 왜 그러셨는지 생각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글쎄요. 맨날 저한테 화를 내시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데, 제 생각에는요, 물론. 아무튼, 그래도 최대한 앞에서는 다 맞춰드리려고 하고, 예의도 갖춰서 말씀도 드리는데. 왜 싫어하시는지는…….”
“회사에 오자마자 핸드폰 충전부터 해서요?”
주리씨는 그렇게 말하면서 쿡쿡 웃었다.
“에이, 그게 전부는 아니겠죠.”
“그러면 수하씨는 왜 박차장님이 수하씨를 싫어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질문에는 대답할 거리가 많았다. 다른 직원들에게는 허허실실 웃으면서 장난도 받아주시고, 업무에 번거로운 일이 생기더라도 웃으면서 면박을 주곤 하는데 유독 내게는 한 번도 웃음을 보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출근시간이나 퇴근시간으로 매번 같은 질책을 하거나, ‘내 때는 그런 적이 없었다’며 행동거지 하나하나에도 핀잔을 섞어서 돌려주곤 했지만, 한 번도 같은 부서의 상사로서 부하직원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를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주리씨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네, 그랬어요 같은 짧은 말들로 호응하면서 한참동안 내 성토를 듣고만 있었다. 어느새 보도블럭을 울리는 또각거리는 구두소리는 심장이 두 세 번 뛸 때에야 한 번 울릴 정도로 느려져있었다.
“수하씨.”
그렇게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내 성토가 끝나고도 한참동안 가만히 있던 주리씨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도 사람들한테 미움을 산 적이 많이 있거든요. 그럴 때 제가 마음을 정리하면서 하는 생각이 있는데 한 번 알려드릴까요?”
“네, 좋죠.”
주리씨같은 사람을 도대체 누가 미워할까 싶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박차장님이 수하씨를 미워하는 것이 분명하고, 본인은 이유를 모르겠다면 딱 두 가지 생각만 떠올려보세요.”
“뭔데요?”
주리씨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멈추고 주위를 훑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귓가를 울리다가, 곧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에 그 자리를 내줬다.
“첫째. 피해 다니기.”
“네?”
방금전까지 하던 농담의 연장선인가 싶었는데, 주리씨의 표정은 퍽이나 진지했다.
“방금 그게 말이 되냐고 생각했죠?”
“아뇨, 그 다음을 들어보고 싶어요.”
내 대답에 주리씨는 살짝 웃어보이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피한다’는 말 자체에 맞서지 않는다는 뜻이 내포되어있어서 다들 언급을 자제하긴 하죠. 그런데 사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일을 피하면서 살아가잖아요. 누가 길에서 담배를 피울 때, 아니면 좋은 말씀 전한다면서 다가오거나 시비를 걸 때, 보행자 신호인데 자동차가 횡단보도를 지나갈 때, 카페 옆 자리에 진상 손님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를 때.”
“그렇죠.”
“어설프게 뿌리를 뽑는 건 때론 가장 어리석인 행동이 되기도 해요. 수하씨 잘못이 없는데도 수하씨를 미워하고 멀리하는 사람을, 굳이 힘들여서 설득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 한 사람에게 내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려주지 않아도 수하씨 인간관계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수하씨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는, 수하씨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요.”
주리씨는 그렇게 말하면서 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 모습은 꼭 발표를 위해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려고 애를 쓰는 여자 아이 같았다.
“두번째. 세상에 얼마나 사람들이 많은지 기억하기.”
“잠시만요, 메모 좀 할게요. 두 번째.....”
“딱 두 개인데 뭘 메모까지 해요?”
내가 핸드폰 메모장을 켜는 사이 주리씨는 숨죽여서 쿡쿡 웃었다.
“수하씨는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요, 요즘? 나이 들수록 경조사 챙길 일이 많아진다는 생각.”
“맞아요. 돈 나갈 일도 많고. 언젠가 나도 걷을 돈이긴 한데.”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던 사람들도 있죠?”
“그렇죠. 밥 먹자, 좋은 일 있으면 연락할게, 했었는데 벌써 자기 애기 사진으로 프로필 사진을 해놓은 친구도 있고 뭐……. 그럼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거죠.”
“그러니까요. 수하씨가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챙기기도 벅찬데, 뭣하러 수하씨를 미워하는 사람까지 챙기려고 해요?”
주리씨는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아끼는 사람 한 명 한 명 챙기기도 벅찬 인생인데, 날 싫어하는 사람 한 명 한 명 생각하고, 떠올리고, 왜 나를 싫어하나 그 이유를 고민하면서까지 챙길 필요는 없다고요. 이유가 없이 미워하는 것이니까. 설령 그 사람이 수하씨를 미워하는 이유를 찾아도, 그건 수하씨가 고칠 수 없는 부분일 거에요.”
나는 주리씨 옆에서 걸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첫 번째, 피한다. 두 번째, 사람은 많다는 걸 기억한다. 사람이 많으니 피한다, 피해도 사람은 많다. 정말로 들을만한 말인지, 아니면 그 말을 한 것이 주리씨라서 설득력이 생기는 것인지, 나는 고민하면서 주리씨를 따라 걸었다.
“수하씨.”
“또 있어요?”
“아니에요.”
주리씨는 고개를 휘휘 젓더니 금세 말을 이었다.
“수하씨는 서른이고, 저도 벌써 서른이잖아요? 우리한테 남은 시간이 이제 몇 년이나 될까요?”
재치있는 말로 웃으면서 넘기려고 했지만, 막상 그 질문에 대한 재치있는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지적을 받아서 내 자신을 바꾸고 고쳐나가는 건 아름다운 일이죠. 하지만, 그렇게 고쳐나가고 있는데도 저를 싫어하는 사람까지 신경 쓸 시간은 없어요.”
“그렇죠.”
“모두가 나를 사랑할 수는 없잖아요? 나라도 나를 사랑해줘야지. 듬뿍.”
갑자기 주리씨는 발을 멈추고 내 팔을 움켜쥐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고 힘있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그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눈 앞의 관계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수하씨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믿고 살아가요. 혹시 알아요? 수하씨를 싫어하던 사람도 언젠가는 그 굳건한 자세를 보고 수하씨를 좋아하게 될지.”
주리씨는 말을 마치고도 한참동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간혹 차들만 지나치는 아무도 없는 밤거리에서, 우리는 그렇게 멍하니 서서 서로를 쳐다보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