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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단풍 May 21. 2024

공생

A씨 이야기

딸이 세상에 나온 다음 배우자 출산휴가를 결재받기 위해 회사에 출근한 A씨는 그의 부서장으로부터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접했다.     


“출산휴가를 좀 끊어 쓰자. 하루씩. 지금 바쁜 시기잖아.”     


법적으로는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배우자의 출산휴가는 총 10일로, 한 번에 한하여 나눠서 쓸 수 있긴 했지만 여러 차례 나눠서 쓰는 것은 불가능했다. 인사팀에서도 그건 할 수 없는 일이라며, 진행하려면 부서에서 알아서 진행하라며 손사래를 쳤다.     


“하루나 이틀이면 그냥 연차랑 다른 게 없잖아요?”

“그런데 열흘이나 더 쓰는 것도 충분히 특혜잖아? 막말로, A씨가 애를 낳았어? 와이프가 낳았지. 고생은 여자들이 하는데 왜 A씨가 쉬려고 해?”

“그야 배우자 출산휴가니까요. 제가 여자였으면 더 길게 받았겠죠. 그리고 아내가 수술을 해서 회복기간 중에는 제가 며칠 더 필요합니다.”

“어머, 왜 수술을 했어? 아내 건강에 문제 있어? 그러니까 A씨가 잘 도와줬어야지.”

“아내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산부인과 의사가…….”

“그러니까, 왜 수술을 권했느냐 이 말이야. 아내가 어디 아프니까 그런 거 아니야?”     


경제권도 여자에게 넘겨라, 여자가 큰일을 한다던 부서장이 왜 오히려 아내를 보살피라는 목적의 배우자 출산휴가를 막는 것인지 A씨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단호했다. A씨가 일주일이나 자리를 비우면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 업무 대체자도 미리 얘기해 놨고, 인수인계도 해뒀습니다.”

“그래도 내 일도 늘잖아. 부서장인 내가 전화 당겨 받고 그래야겠어? 우리 부서를 위해서도 부서장이 자질구레한 일을 떠맡으면 안 된다니까? 다른 곳에서 우리 부서를 만만하게 볼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A씨는 팀원들을 쳐다봤지만 그의 편을 들어줄 만한 용기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는 배우자 출산휴가를 여러 차례 나눠서 쓰는 것은 인사팀에서도 거절했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지만, 부서장은 오히려 팀의 막내가 어떻게 부서장의 의견에 토를 달 수 있냐며 일방적으로 대화를 끊고 자리로 향했다. 가림막 뒤에 서서 하릴없이 허공만 바라보던 A씨는 터덜터덜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오늘 점심 같이 먹을 사람?]     


아내에 대한 걱정과 배우자 출산휴가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렇게 사내 메신저가 울렸다. A씨 대신에 노동조합 실행 위원에 합류했던 동기였다. 통 연락이 되지 않던 사람이라 알림이 뜨기 무섭게 다른 동기들의 답신이 이어졌다. 당장 부서장과 마주 보고 밥을 먹을 자신이 없던 A씨도 다급히 식사 자리에 합류하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잘 지냈어? 걱정 많이 했다, 야.”     


손님이 없는 조용한 식당에서 모인 A씨와 동기들은 알림을 보낸 동기를 토닥였다. 음식이 나오기 전 냉수를 벌컥벌컥 마신 그녀는 쉴 틈도 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생각하고 너무 달랐어.”

“어땠는데?”     


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맨 처음 그녀를 실행위원으로 영입할 때부터의 이야기였다. 노동조합의 대표라는 사람들은 직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싸울 것이며, 특별히 ‘전환’이라는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이야기했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기에 전환의 당사자인 그녀를 실행위원으로 모시고 싶었다는 것. 여기까지는 A씨에게 찾아와서 이야기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다음 첫 회의를 갔단 말이야.”     


하지만 첫 만남부터 모든 것이 그녀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일단 시작하기 직전 부위원장이라는 사람은 그녀에게 노트북을 건네며 회의록 작성을 지시했다. 생각지도 못한 업무 지시에 그녀는 당황하면서도 다급히 키보드를 두드렸는데, 회의 내용조차 대부분 워크숍을 어디로 갈지, 언제 갈지, 1박으로 할지 2박으로 할지, 회식 장소는 어디로 할지 등 직원들의 권익과는 관계없는 내용이었다.     


“그다음에도 비슷했어. 미리 말도 안 해줬으면서 회의록 작성은 내가 쓰는 걸로 아예 정해져 있었고, 사람들 모으는 연락도 내가 돌리고, 행사 관련해서 예약이나 인원 조사 같은 자질구레한 일도 다 나 혼자서 하고. 하여튼 귀찮은 것만 나한테 다 떠넘기는 거야.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회의를 하는데 내용은 없고. 조금 있으면 임단협 준비도 해야 하는데, 정작 그 세부 내용에 대해서는 자기들끼리만 얘기해. 내가 있을 때는 무슨 직원 동호회를 지원해야 한다느니 그런 얘기나 하고 있어.”     


오랜만에 만난 동기의 토로에 다들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녀를 토닥였다. 하지만 그녀는 막 식사가 나오기 시작할 무렵 오히려 더 단호한 태도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건 그렇고, 사실 내가 연락한 건 다른 이유야.”     


회의록 작성에 회의 자료를 미리 만드는 일까지 떠맡은 그녀에게는 노동조합 사무실의 PC를 조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 덕분에 그녀는 과거 노동조합의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적당한 호기심과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지에 불타던 그녀는 A씨와 동기들이 입사하기 전 몇 년의 기록을 찾아보게 된 것이다.


“너네 ‘공생 조약’이라는 것 들어봤어?”

“그게 뭔데?”

“우리가 입사 하기 전에 노동조합하고 회사하고 체결했던 조약이야.”     


그녀의 요약은 이러했다. 몇 년 전부터 회사는 신입직원을 뽑지 않았다. 매출과 수익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매년 퇴직하는 직원은 생기지만 들어오는 직원이 없으니, 당연하게도 직원 한 명 한 명에게 부여되는 업무가 점점 쌓이기 시작했다. 결국 노동조합이 직원들을 대표하여 회사에 공개 채용을 진행하라는 요청을 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위해 사측과 노동조합의 협상 테이블이 열렸다.     


회사가 내건 조건은 바로 신입사원의 연봉 변화. 회사 재정에 타격이 가지 않도록 연봉을 기존 초봉의 60% 수준으로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연봉을 줄이면 누가 회사에 지원하겠냐고 노동조합은 반발했지만, 여기서 회사는 ‘3년 후 전환’이라는 카드를 꺼낸 것이다. 이 당시에도 어떻게, 얼마나 전환을 할 것인지는 정해지지 않았으나, 회사는 이런 조건이 아니라면 공개 채용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노동조합은 회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신입 사원의 초봉 하락, 그리고 ‘전환’이라는 절차가 포함된 공개 채용을 매년 진행하겠다는 회사와 노동조합의 조약이 약칭 ‘공생 조약’이었다.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니었다. 회사는 그 당시 모든 노조원에게 ‘공생 조약 위로금’이라는 것을 지급했다. 일시금 이백만 원이 그 당시 전 직원들에게, 그러니까 A씨의 선배 직원들에게 지급됐던 것이다. 바로 조약 체결에 대한 대가였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들은 A씨의 동기들은 하나같이 욕을 내뱉었다.     


“결국에는 다 한통속이었다는 얘기네.”

“아니, 왜 공생이야? 신입직원 목을 쥐어짜서 둘이 살아남으면 그게 착취지 공생이야?”

“꼴랑 이백만 원에 후배들을 팔아넘겨? 그래 놓고 선배가 어쩌고?”     


A씨는 몸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면서 한숨을 길게 내뱉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눈앞이 선명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과연 누가 나쁘고 누가 어리석었던 것인지, 이것들을 모두 바로잡을 현명한 방법이 있을지, 물속을 떠돌아다니는 한 올의 머리카락을 잡으려는 것처럼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막연한 기대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인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비로소 그가 해야 할 일이 명료해졌던 것이다.     


그는 회사에 대항할 수 없다. 당연했다. 회사는 물론이고 선배들도, 노동조합도 그들의 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작 입사 삼 년 차에 불과했던 A씨와 그다음으로 들어온 어린 직원들이 회사와 노조가 맺은 협약을 뒤집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설령 뒤집으려고 해도, 회사로부터 돈까지 받은 선배 직원들이 그것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A씨는 화가 났지만 마음의 무게가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A씨는 동기들 중 가장 먼저 숟가락을 다시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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