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없이 쓰는 글
왜 나는 분노하지 못하는가!
사실은 거꾸로다. 왜 나는 그렇게 속으로 모든 일에 분노하면서, 정작 내가 분노를 표현해야 할 일에는 분노를 표현하지 못하는가! 예전에 어떤 시인은 그랬다. 어찌 큰 일에는 화내지 못하고 작은 일에만 분노하느냐고. 그런 성숙한 고찰이 아니다. 그냥, 나는 화가 많고 여기저기 분노하면서도 막상 그 상황에서 화를 내지 못한다.
두려움일 것이다. 내가 화를 내면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치달을 것에 대한 두려움. 대체 무엇이 그렇게도 두려운지, 심지어 나는 운전하면서도 화를 내지 못한다. 엇, 하고 꾹 참고 지나가다가 한참 뒤에야 머릿속에서 계산된 욕을 내뱉곤 했다. 물론 방어 운전을 위한 경적이나 상향등 조작 정도는 할 수 있지만 말이다.
사실 이건 나도 안다. 건강하지 못한 성향이라는 것을. 사회적으로도 화를 제 때에 내지 못하면 건강한 관계를 정립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화를 내지 못하는 호구가 될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속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답답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 혹은 나를 좋아하는 사람 양 쪽으로도 여러모로 불편함을 초래하는 성향인 것이다. 나를 아끼면 아끼는만큼 걱정도 되면서 답답할 것이고, 나를 싫어한다면 그만큼 나를 막 대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니 말이다.
최근에는 두 가지 경우를 모두 경험하고 있다. 당연히 분노해야 할 일에 침착하게 맞서니 누구는 잘했다고 하지만, 정작 나는 홧병이 나서 잠에도 제대로 못 들고 있다. 그리고 어디에서나 그렇듯, 사람은 자신의 적으로 간주되는 사람에 대한 뒷담화를 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사실에서 근거한 것이든, 자신의 기분에서 근거한 것이든 말이다. 그리고 이 경우, 그 사람이 나에 비해 월등한 경력을 가지고 있을 경우 상당한 부담이 된다. 당연하게도, 그 사람이 그렇게 나설 수 있는 것은 내가 화를 낼만한 깜냥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어찌하겠는가? 이미 그 때는 지나버린 것이다. 이제와서 화를 내면 그냥 나는 감정 조절을 못하는 멍청이가 되는 것이고, 그렇다고 참고 있자니 상대방이 독을 풀어놓은 우물 물을 하루에 몇 모금씩 마셔야 하는 자발적인 환자가 되는 셈이다. 처음 부딪혔을 때 대부분 내 편이었던 사람들도 시간이 가면서 은근히 내게 먼저 숙이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을 하게 됐다. 물론 그것은 정말로 상황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었을 수도 있고, 내가 애초에 싸울만한 인재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건넨 조언이었을 수도 있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내 뒤에서 그들끼리 또 말이 오고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를 아끼는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다. 나를 얕잡아보는 사람에게도 화를 못 내면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는 사실 자체가 내게 주는 자괴감도 큰 장애물이며, 혹시나 내가 표현한 분노로 인해 이 사람마저 내 곁을 떠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은 그보다 몇 배는 더 큰 산처럼 다가온다. 아, 하지만 그 사람도 분명히 선을 넘는 경우가 있으며, 거기에 대해서는 따끔한 지적이 필요함을 알면서도 왜 나는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인가.
아무튼, 화를 제 때에 내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외로움을 초래하는 것이다. 타오른 불을 제 때에 내보내고 뿜어내야 서로 조심하게 되는 법일진대, 가슴에 품고 꺼질 때까지 끌어안고 있으니 아무도 신경쓰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