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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편 단편소설

by 봄단풍

살아오며 슬픈 일들을 참 많이 겪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펜을 들고 이 편지를 남기는 것은, 그동안 만났던 그 어떤 일보다도 슬픈 일이 제게 닥쳤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의사선생님은 제게 그런 말씀을 던지더군요. 몇 시간 남지 않았다고. 원인을 알 수 없는 희귀한 병이라고 합니다. 치매인지, 혹은 그와 관련된 바이러스인지 무엇인지는 몰라도, 불과 몇 시간만에 기억이 지워지는 병이라고 합니다.


혹자는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고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분에 겨운 축복이 망각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오며 둘 중 어느 쪽에도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삶이 아름다운 이유는 한 순간 한 순간 소중히 간직한 추억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편지를 남기려 합니다. 제 머릿속을 지우는 녀석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갑작스런 여행 전날 짐을 싸듯 조금이라도 제게 남은 아름다운 순간들을 글로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급한 여행에 짐을 싸듯이, 라는 표현을 했으니 생각나는 대로 적는 것이 맞겠죠. 아, 그래요. 나이가 비슷해져서인지 할아버지와 했던 약속이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이미 손자가 여럿인 내게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흐려진지 오래지만, 그 분과의 약속이 떠오르는 건 여태껏 지키지 못한 것이 한이 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바둑으로 할아버지를 꼭 이기겠다는, 선전포고를 가장한 자주 찾아뵙겠다는 약속이었죠. 어쩌면 곧, 그 약속을 지키러 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군대에서의 경험도 빼놓을 수 없군요! 이 나라에 살면서 어찌 그 기억을 잊을 수 있을까요. 스물 한 살과 스물 두 살, 가장 뜨거워야 할 순간을 함께 나라에 바치는 전우들과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끈끈한 동지애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군기 때문이라며 아득바득 욕설을 주고 받으면서도 함께 흙먼지를 마시며 뒹굴기도 하고, 힘겹게 접해들은 기사거리 하나에 전쟁이 날까 조마조마하면서 잠에 들기도 했던 기억.


함께 흙먼지를 뒤집어 쓴 친구는 또 한 명이 더 있습니다. 우리 달이. 이불 뒤집어 쓰는 걸 좋아하고, 자려고 눕는 걸 참 좋아하던 녀석. 침대에 누우려 방 불을 끄기만 해도 땅파듯이 이불을 박박 긁어대고, 현관문을 열기만 하면 방방 뛰면서 두 발로 안아달라고 조르던 달이. 함께 하던 강아지는 천국에서 먼저 기다린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내 기억이 곧 지워져도 달이는 날 기억하겠죠?


아, 글을 쓰다 보니 하나씩 기억이 돌아오는 기분입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이토록 기억이 선명한데. 대학에 입학 후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했던 기차여행. 일주일동안 기차를 마음대로 탈 수 있는 승차권 하나를 가지고 전국을 돌았었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역시 일주일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찾아다녔던 게임방입니다. 팀웍을 배우고, 욕을 무시하는 법을 배웠으며, 즐거움을 위해 욕심을 포기하는 법을 배웠더랬죠.


회사를 퇴직한 후에, 처음으로 혼자 떠났던 유럽 여행도 기억이 납니다. 힘들게 들어간 첫 직장에서 일 년여간 일하며 남은 것은 모은 돈과 퇴직금 뿐. 그 돈의 절반을 투자한 긴 여행이었지만 한 장면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 보는 건물과 도로들, 바쁜 모습 하나만큼은 익숙했던 낯선 이들, 강과 들판, 산, 볼 수 없던 새들까지도. 여행이 끝나갈수록 다시 취직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병처럼 마음에서 떠나질 않았지만, 그럼에도 다시없을 경험이라는 생각에 다녀오고 난 뒤로 몇 주동안 마음이 따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전 기차여행도 갔었습니다. 사진이 더 남아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대학 입학 후에, 친해진 친구들과 함께……. 이런 젠장, 바로 위에 써놨잖아. 이 병이 뭔지는 몰라도 벌써 진행중인 것 같습니다.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낍니다.


사실 피하고 싶었던, 아팠던 기억이지만 가장 아름다웠던 추억도 있습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한 구석이라도 더 닮고 싶었던 선배의 모습. 잠깐의 인사만으로도 하루가 행복해지고, 무심한 메시지 한 통으로 일주일이 고단해졌던 그 날들. 몇 년 뒤에 우연히 길에서 만나 연락처를 교환했을 때에는 운명이 우리를 돕는가 싶었지만, 첫 눈처럼 새하얀 청첩장은 진짜 운명이 무엇인지 제게 가르쳐줬었죠. 눈은 아름답고, 차가우며, 금방 녹아버립니다. 결국 그 자리에 남겨두는 것은 체온을 담아 따뜻한 한 방울의 눈 물.


아, 이제는 기억이 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제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낍니다. 딱 한 가지를 더 쓸 만한 시간. 그렇다면 지금부터 적는 것이 마지막일텐데. 무슨 이야기를 적어야 할까……. 마지막은 아무래도 사랑이어야 하겠죠. 저 혼자만 마음에 품었던 사람, 한 번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한 채 보내야만 했던 사람. 아, 선배. 선배는 지금 건강히 잘 지내고 있을까요, 그 때 그 하얀 봉투에 적힌 이름의 그 분과, 여전히 두 손 꼬옥 붙잡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을까요…….


하품을 한 모양입니다. 눈에 눈물이 흥건한데, 도무지 왜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일기를 쓰던 중이었던 것 같은데 오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네요. 이럴 때는 얼른 씻고 푹 자라고 의사선생님이 말했던 게 생각납니다. 딱 한 숨만 자고, 일어나서 다시 써야겠어요.


간만에 꿈도 없는 긴 잠을 자고 일어났습니다. 그 덕에 하루 종일 기분이 좋을 뻔 했는데, 의사선생이 선물이랍시고 준 일기장 덕에 다 망쳐버렸어요. 대체 남이 쓰던 일기장을 왜 주는 거람! 난 곧 이 앞 장을 뜯어 버릴 생각입니다. 앞에 이 한 장만 찢어버리면, 나머지는 완전 새 일기장이니까요. 기왕 일기를 쓰려면 첫 장부터 새 것인 게 느낌이 좋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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