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편 단편소설
“여기에요, 할아버지.”
급하게 먹은 점심이 얹히기라도 한 것인지, 할아버지의 표정은 계속 어두웠다. 대답 대신 창가 쪽 자리에 무너지듯 앉은 할아버지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이내 눈을 감았다.
점심을 급하게 먹고 올라탄 기차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창가 자리에만 몇 명이 앉아있을 뿐, 나와 할아버지처럼 2인석에 두 명이 나란히 앉아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벨트 매셨어요?”
단 하루 뿐이긴 했지만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여행은 신경쓰이는 일이 많았다. 혼자라면 별 생각없이 지나쳤을 일도 꼼꼼히 살피게 됐다. 애초에 점심을 급하게 먹은 것도, 오랜 시간 앉아있을 할아버지가 걱정되어서였다. 괜찮다며 손사래 치는 할아버지의 허리에 벨트를 두르고 나서야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앉았다.
기차는 금세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하철의 요란한 덜컹거리는 소리 대신 문 닫은 클럽에서의 울림처럼 둔중한 소리가 먼 밑바닥에서 조금 들려온다 싶더니, 기차는 어느새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차창 밖에는 아직 익숙한 도심의 빼곡한 건물들과 회색빛 도로가 지나가고 있었다.
“할아버지, 순천이 그렇게 대단해요?”
대답은 없었다. 어느새 잠에 빠져든 것인지, 할아버지는 눈을 감고 들릴 듯 말 듯한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평소에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모습이기도 했다. 편안히 누워서, 눈 감고 숨을 작게 쉬는 모습.
몇 년전 할아버지를 업고 응급실에 갔을 때도 그랬다. 기말고사를 불과 하루 앞둔 대학생이던 어느 날, 할아버지는 가슴이 답답하다며 문을 열고 나오셨다. 주름 가득한 얼굴이 더 깊게 깊게 패인 날이었다.
『숨 쉬기가 힘들다.』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할아버지를 업고 택시를 잡았다. 생각할 겨를이 없어서인지 마음은 오히려 차분했다. 응급실에 도착한지 몇 분만에 누워있는 할아버지의 몸에 주사기가 꽂혔고, 일그러졌던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다시 평온이 감돌았다. 단지 평소와는 다르게 지친 듯 숨이 일정하지 않은 것이 조금 불안했다. 그리고 또 몇 분이 지나자 부모님이 응급실로 들어왔다.
『들어가 봐.』
『괜찮아요?』
『응. 내일 시험이잖아. 들어가.』
표정을 알아보기 힘든 할아버지였지만, 그 때만큼은 입가에 미소를 얹었다고 느꼈었다. 그리고 그래서인지, 그저 다행이라는 생각만 품은 채 집으로 후련히 돌아왔었다.
“다행이에요, 할아버지.”
어느새 기차 안을 파고드는 따뜻한 오후 햇살처럼, 슬그머니 퍼져가는 안도감을 혼잣말로 슬쩍 뱉어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지만 옛날 그 때처럼 미소를 띤 것처럼 보였다.
기차는 꾸준히 달렸다. 해가 머리 위에 있을 때 막 속력을 내던 기차는, 어느덧 해가 멀리 있는 가로등처럼 걸려있을 때 순천에 도착했다. 찌부둥한 몸을 이끌고 승강장으로 기어나와 기지개를 한껏 켜는 사이, 할아버지는 편하게 하품 한 번으로 몸의 묵은 피로를 다 씻어냈다.
“가요, 할아버지.”
당일치기 여행의 좋은 점은, 함께하는 사람을 붙들 수 있는 손이 남는다는 것이다. 한 쪽 어깨에 달그락거리는 작은 손가방을 건 채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거칠고 늘어졌지만 따뜻한 손. 언제 마지막으로 잡았었는지, 어느새 생각은 아득히 먼 옛 기억으로 돌아가 있었다.
『고구마 하나만 먹으면 안돼요?』
참 힘들게 꺼낸 말이었다. 맞벌이하는 부모님 대신 하루 종일 내 곁에 있던 건 할아버지였고, 할아버지에게 뭔가를 요구하거나 조르는 건 어린아이에게는 너무나 값비싼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때로는 그 모든 값을 치를 정도로 강렬한 욕구가 생기곤 한다.
『먹어.』
그리고 때로는, 비싸리라 생각했던 댓가가 훨씬 쉬울 때도 있고.
『할아버지, 그건 뭐에요?』
한 손은 내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주머니에 뭔가를 만지작거리던 할아버지는 내 질문을 듣고 나서야 천천히 꺼냈다. 손바닥만한 낡은 라디오였다. 사실 그걸 모를 정도로 어린 나이는 아니었지만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라디오.』
『근데 왜 소리가 안 나와요?』
할아버지는 어디 외출할 때마다 꼭 그 라디오를 챙겼다. 건전지도 갈아주고, 뽑으면 초등학교 선생님 회초리마냥 길어지는 낡은 안테나도 꼭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고. 하지만 할아버지가 들고 다니던 그 라디오에서 지지직거리는 기계음 외에 다른 소리를 들어본 기억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낡아서 그래.』
『지지직소리 나는데?』
『그래, 낡아서 그래.』
『근데 왜 들고 다녀요?』
아직 존댓말을 채 익히지 못한 어설픈 내 질문에, 할아버지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머니가 사준거야.』
그 어린 나이의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사실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를 느끼긴 한 듯, 할아버지를 헤 벌린 입으로 쳐다보던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손에 들린 군고구마를 조용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할아버지가 사준 거.』
때로, 할아버지의 미소를 징그럽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얼굴이 패인 주름들이 더 벌어지기도 했고, 그 구질구질한 담배라는 친구 때문에 누렇게 변한 이들을 보는 것도 싫었고. 마치 웃음이 할아버지의 건강을 해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만큼은, 그리고 그 때 이후로는 할아버지가 더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우대권 단편소설 『마지막 승부』 중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