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편 단편소설
기차에서 내렸을 때 이미 해가 기울어져 있던 터라, 좋은 경치를 보기 위해선 서둘러야 했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택시를 잡은 우리는 채 삼십분이 되지 않아 순천만에 도착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금빛으로 물든 하늘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 왔어요.”
나는 도무지 멈추지 않는 미소를 얼굴 가득 흘리며 할아버지를 돌아봤다. 점심을 먹고 기차를 탄 뒤로 계속 무심한 표정을 짓던 할아버지의 얼굴에도 다행스럽게도 편안한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할아버지의 얼굴을 잠시 마주보던 나는 그 손을 붙잡은 채 순천만으로 향했다.
더울 것 같던 그 곳에는 시원한 공기가 맴돌았다. 메아리처럼, 한 번 스쳐간 바람은 끊임없이 근처를 돌며 머리를 간지럽혔고, 키만큼 높게자란 갈대는 숨바꼭질하듯 고개를 돌릴 때마다 살랑거렸다. 쳐다보면 멈추고, 돌아보면 살랑거리고. 머릿속에서 들리는 쿡쿡거리는 웃음소리는 그 사이 사이 숨어있는 요정들의 것일까. 오랜 기차여행의 피로는 순식간에 씻겨나갔다.
길을 쭉 따라 걷다보니 오른 편에 작은 정자와 의자들이 나타났다. 앞으로 계속 걸어가면 순천만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산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탁 트인 하늘만큼이나 멀리 내다보이는 길을 한참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이내 마음을 굳힌 듯 다시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괜찮겠어요? 쉬었다 가지.”
걱정이 깃든 내 목소리는 얄궂게도 그 어느 때보다 들떠있었다. 할아버지는 대답대신 성큼성큼, 오늘 하루 중 가장 힘찬 걸음을 옮겼고, 나도 행여 뒤처질세라 열심히 따라 걸었다. 어쩐지 어렸을 적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에 나는 콧노래를 멈출 수가 없었다. 라디오를 한 손에 들고 걷던 할아버지, 군고구마를 주머니에 넣고 걷던 까까머리 소년.
그림자가 점점 길어졌다. 늘어진 금빛은 점점 눈이 부시게 진해졌고, 갈대의 춤사위도 점점 격해졌다. 시원했던 바람이 서늘하다고 느껴질 무렵, 할아버지와 나는 오르막길의 초입에 들어섰다. 첫 걸음에 힘을 너무 많이 쏟은 탓인지 할아버지는 허리를 한 번 곧게 펴더니 이내 긴 한숨을 내뱉었다.
“천천히 가요.”
잠깐 놓았던 손을 다시 붙잡은 나는, 할아버지의 옆에 좀 더 붙어서 걷기로 마음먹었다. 부축하듯 팔짱을 깊숙이 끼고 몇 걸음 옮기니 할아버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갔다. 늘어질대로 늘어진 살과 근육, 잡기만 했는데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전해지는 골격,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몇 번이고 힘겹게 내뱉어지는 작은 한숨들.
다행히 산은 높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무게도 감당하며 걷느라 숨이 금방 가빠질 무렵, 나무들 사이로 아까의 그 환한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게 물든 먼 바다와 하늘의 입맞춤. 어디 숨었는지 한 눈에 보이는 갈대밭의 요정들. 숨을 쉬느라 벌어진 입에서는 탄성이 흘러나올 만도 했는데, 오히려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왜 오고 싶어했는지 알 것 같아요.”
절벽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바위에 앉으며, 나는 한 쪽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경치를 내려다보며 숨을 고르던 할아버지는 걷는 내내 달그락거리던 내 가방에 시선을 놓은 채, 내려놓은 가방 옆에 털썩 자리를 잡았다.
“약속 했었잖아요, 할아버지.”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한 할아버지의 표정을 보고나서야, 나는 설명을 덧붙여야함을 깨달았다.
『다음에는 꼭 이기러 올게요.』
도전장이었다. 나이차가 반 세기도 넘는 어른에게 갓 스무살이 된 청년이 던진 선전포고였다. 엄밀히 말하면 선전포고보다는 약속에 가까웠다.
흔히 있는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했던 대가족이, 아이를 대학에 보내면서 갈라지게 되는 일. 무엇이 할아버지로 하여금 본가에 남아있게 했는지는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우리가 서울로 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주머니에서 지직거리던 라디오와 비슷한 이유였으리라 생각했다.
『전화 자주 할게요.』
드라마같다고 생각했다. 아주 전형적인 드라마, 혹은 중학교 시절 국어교과서에서 접할 수 있었던 아주 흔한 이야기. 왼손에 붙어있는 라디오만큼이나 할아버지의 오른손에서 떨어지지않던 담배는 그 때 이미 할아버지의 온 몸을 옭아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의사선생님은 함께하는 시간을 더 오래 보낼 것을 종용했고, 아버지는 자녀의 대학진학을 포기할 수 없었고, 할아버지는 가슴 깊이 새겨진 추억에 등을 돌릴 수 없었고.
『같이 가면 좋을텐데!』
할아버지는 얼른 들어가라며 손을 흔들 뿐이었다. 이미 다른 가족들은 기차에 올라탄 그 때, 아직 출발까지는 몇 분이 더 남은 그 때. 나는 못내 떨어지지않는 발을 억지로 뒤로 움직이며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아무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기는 싫었다. 한 번도 할아버지와 작별인사라는 것을 해보지 못했던 나는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말을 어버버하다가, 기차 문이 닫히기 직전에서야 겨우 말을 뱉은 것이다.
『꼭 올게요. 다음에는 꼭. 이기러 올게요.』
『에헤이, 그래. 연습 많이 해서 와.』
달칵거리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돌 위에 내려놓은 가방이 열렸다. 나는 누런 때가 여기저기 늘어붙은 자석 장기판을 펼치며, 안에 들어있던 장기말을 우르르 할아버지 앞에 쏟아놓았다.
“어떤 걸로 하실래요?”
그제야 기억이 돌아온 것인지, 할아버지는 씨익 웃으며 빨간 장기말을 집어들었다.
- 우대권 단편소설 『마지막 승부』 중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