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승부 3/3

하루 한 편 단편소설

by 봄단풍

배치가 끝난 진영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분명 거울에 비친 것처럼 동일한 배치인데도 할아버지와 내 진영은 분위기가 달랐다. 마상상마. 좌우 대칭인 할아버지의 진영은 가장 기본적인 배치일텐데 전혀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반면 마상마상인 내 진영은 어쩐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처럼 빈약해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내게도 나름의 전략이 있다. 힘들게 얻은 시간이고 귀한 자리이니만큼 호락호락하게 당할 생각은 없었다. 어린시절의 기억을 활용하여 할아버지의 수를 얼마나 예측할 수 있을지가 승부의 관건이 되리라.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손깍지로 굳은 몸을 풀어주고, 어깨를 한두 번 돌려주고. 뭐든 첫 시작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새 노트에 첫 글자를 적을 때처럼, 오랫동안 미뤄왔던 전쟁의 시작을 위해 나는 가장 경건한 마음으로 몸을 풀었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게 푼 몸을 다시 바위위에 쪼그려 앉히며, 나는 첫 수를 뒀다.


시작은 수월했다. 양 옆의 길을 터서 차 두 개를 모두 위로 올린 나는, 궁 앞에 배치한 포와 함께 정면을 압박했다. 단순하면서도 빠른 압박. 그러나 웬걸, 할아버지는 당황하거나 차를 허겁지겁 꺼내는 대신 상과 마로 내 차가 들어갈 길을 순식간에 봉쇄했다. 멱이 많아 운용이 쉽지 않은 상을 어찌 그리 잘 다루시는지.


하지만 이 정도까지는 나도 예측하고 있었다. 나는 과감하게 내 상을 할아버지의 졸과 바꿔가며 차가 들어갈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엎치락뒤치락, 한 번 시작한 서로에 대한 살생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잡았다 싶으면 어딘가에서 포가 날아와 그 자리를 메꿨고, 뚫었다 싶으면 차가 들어갈 자리에 미리 상이 화살을 겨누고 있었다. 애초에 시작부터 절대 쉽게 끝날 승부는 아니었다.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잔뜩 쪼그린 목이 뻐근해질 무렵 금빛 하늘은 진한 붉은빛으로 물들어갔다. 요정들이 숨어있던 갈대숲은 잔잔한 파도가 이는 바다로 변해있었고, 먼 하늘로부터 내려온 그늘은 산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보랏빛 하늘에는 별들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채 인사를 못 마친 태양은 빨간 손으로 구름을 붙들고.


한 수 한 수, 시간이 길어질수록 피곤할 만도 한데 할아버지의 자세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버릇처럼 오른손을 말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실 뿐. 장기판 위에 두어진 눈은 오랜만에 생기가 가득. 어쩐지 뿌듯한 마음에, 나는 미소를 흘리며 하나밖에 남지 않은 차를 움직였다.


“장군.”

“멍.”

“음……. 장이요.”

“멍군.”

“장군!”

“끌…….”


먹고 먹히기를 반복하길 어느새 십 여분. 할아버지도 나도 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전략보다는 임기응변과 재치가 필요한 상황, 경험과 연륜이 활약할 시기. 내가 내세울 수 있는 무기는 패기뿐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맞교환을 위해 마와 궁 뒤의 포로 승부수를 던졌다.


“진짜 장군!”

“…….”


할아버지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오늘 여행 중 처음으로 내 눈을 똑바로 마주봐왔다. 해가 저문 하늘 때문인지 붉어진 할아버지의 눈시울 너머에서, 대견함을 1초 정도는 본 듯 했다. 물론 내 개인적인 바람을 곁들여서 말이지.


“끌끌.”


그런 내 바람이 무색하게도, 할아버지는 내 마지막 장군인 마를 가차없이 장기판 밖으로 밀어냈다.


“와.”


나는 한숨을 쉬며 뒤로 물러섰다. 말이 몇 개 남지않은 장기판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멀리서 보면 혹시나 새로운 길이 보일까 싶어 몸을 뒤로 더 기댔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할아버지를 쳐다봤다가 다시 장기판을 내려다봤다가. 새빨갛게 물든 하늘은 누가 이겼는지 속보를 띄워주는 전광판 같았다.


그렇게 승부는 끝났다. 홀로 남은 궁이 못내 아쉬워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나는 다시 한 번 길게 숨을 내뱉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동시에 쏟아지는 피로, 그리고 묘한 안도감. 어쩔 수 없는 결과이기도 했다. 내가 아무리 장기를 많이 뒀다한들 수십 년의 세월을 극복할 수는 없었던 거다.


“고생하셨어요, 할아버지.”


항복과 존경의 의미를 담아, 나는 내 궁을 장기판 맞은편 빈자리에 놓았다.


“…….”


바람이 멎었다. 파도처럼 일렁이던 갈대밭도 조용히 제 자리에 서고, 하얗게 천장에 박힌 별들도 잠시 반짝거림을 잊은 듯. 먼 바다 빨갛게 타오르던 태양만이, 꺼지기 직전의 성냥처럼 주위에 짙은 남색의 그늘을 남긴 채 조금씩 사그라지고 있었다. 해가 조금만 더 오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승부가 조금만 더 일찍 끝났더라면, 기차를 조금만 더 빨리 타고 왔더라면, 여행을 조금만 더 빨리 계획했더라면,


조금 더 빨리 약속을 지켰더라면.


나는 멍하니 장기판 너머 휑한 그 자리를 눈으로 훑었다. 할아버지가 오셨더라면 어떤 자세로 앉아 있었을까, 바위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바다쪽으로 다리를 대롱대롱 내린 채 허리를 틀고 앉았을까?


“언제쯤 이길 수 있을까요, 할아버지.”


애초에 끝이 정해져있던 승부였다. 세상에서 가장 공정하다는 가위바위보도 한 사람이 두 손으로 한다면 의미없는 손짓에 불과한 것이다. 다만 몇 년간 방구석에서 먼지만 담아내던 장기판처럼, 가슴 한 구석에 덮어두고 모른척 했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꺼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해가 지면 온전히 어두울 줄로만 알았던 순천만은 생각보다 밝았다. 별빛, 달빛, 그 아래 일렁이는 갈대밭 그림자. 남색 물감에 물을 많이 섞은 것처럼 그 어둠은 깊고, 또 맑았다. 어디까지가 바다고 어디서부터가 하늘인지 알기 어려워진 먼 풍경은 솜이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두텁고 감촉이 참 좋은, 또 반짝이는 하얀 별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그런 솜이불.


“이제 가볼게요. 내일 출근해야 해요.”


또 다시 지울 수 없는 핑계를 대며,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승부에서 지고도 멀쩡했던 얼굴에서 그제야 눈물이 흘렀다. 마지막까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나는 핑계에서 도망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용서를 비는 말도 끝까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음에는 꼭. 늦지 않게 올게요.”


달그락거리는 가방을 어깨에 멘 채, 못난 까까머리 소년은 홀로 발걸음을 옮겼다.


- 우대권 단편소설 『마지막 승부』 중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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