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편 단편 소설
“뭘 보고 있어요?”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는 여인에게 질문이 날아든다. 초점없이 멍한 눈을 의식해서였는지, 아니면 기운없이 의자에 축 늘어진 그 몸을 의식해서였는지. 한없이 조심스러운 목소리였지만, 여인은 대답 대신 눈을 한 번 깜빡, 감았다 떴다. 사실 피곤했던 탓도 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곳으로, 정확히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곳으로 힘겹게 발을 옮긴 터라 여인은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다.
“바람이 차요.”
빈틈없이 뒤로 바짝 모아 묶은 머리였음에도, 귓가에는 미처 함께하지 못한 머리카락이 한 가닥 흘러나와있다. 강가의 조그마한 시냇물처럼 흘러내린 그 금빛 머리카락을 살랑, 창문을 넘어 들어온 바람이 쓰다듬는다. 그 손길을 느끼려는 듯 잠시 눈을 감은 여인은 한 쪽 팔로 턱을 괴며 다시 눈을 천천히 뜬다.
사실 여인이 눈에 담은 건 아주 소소한 것들이었다. 저 멀리 밝아오는 하늘. 솜씨 좋은 재단사가 수를 놓은 듯 경계가 모호한 금빛과 푸른빛의 하늘. 그 아래 펼쳐진 갈대밭은 수줍게 춤을 추고. 그 끝에 똑 똑, 떨어지는 이슬은 전날 밤 속절없이 내린 비 때문인지, 습한 공기 때문인지.
무엇을 본다, 묻는다면 그 갈대 끝에 달린 물방울이라고 여인은 대답했으리라. 어쩌면 그 안에 담긴 보이지 않는 풍경인지도 몰랐다. 아니 사실은, 그 물방울 하나하나에 그동안 돌아보지 못한 기억들을 비추어보고 있는 것이라고, 가슴 한 구석 깊숙이 묻어두었던 오래된 사진같은 추억들을 잠시 담아 보고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으리라.
“뭐가 보여요?”
눈치 없이 목소리는 그렇게 또 끼어들었다. 이번에 여인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한 번 더 불어온 바람에, 이번에는 의자 아래로 늘어진 분홍빛 원피스가 가볍게 춤을 춘다. 대답 없이 여인은 멀리서 일렁이는 갈대를 바라봤다. 건듯 분 바람이 멀리서 한 걸음 또 한 걸음 다가오는 듯. 듬성듬성 움직이는 갈대들 사이로 익숙한 금발의 소녀가 걷는 모습이 보인다.
여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어쩐지 그 소녀가 자신을 향해 달려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천천히 자세를 일으켰다.
한 번 더 춤을 추는 갈대들 사이로, 이번에는 다른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자란 소녀, 그리고 그 옆을 함께 걷는 아이들. 한 손에는 장난감, 또 낡은 공을 들고 열심히 달리는 그 아이들의 무릎은 전부 흙투성이였다. 뭐가 그리도 재밌고 좋았던 것인지. 여인은 결국 풋, 하고 웃음을 내뱉었다.
조금 더 일찍 돌아올 걸. 여인은 자꾸만 흐려지는 눈을 손으로 닦아내며 결국 이마를 찌푸렸다. 점점 밝아오는 하늘 덕에 흐리기만 했던 갈대밭은 어느새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조금 더 많은 기억들이 돌아왔다. 찌푸린 덕에 선명히 다가오는 기억을 여인은 활짝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소녀는 참 빨리 자랐다. 드레스를 입고 흙바닥에서 개구리를 잡던 아이는 어느새 책을 지고 다녔고, 다소곳한 걸음걸이와 예의를 배웠으며, 시와 노래를 흥얼거렸다. 마을에 다녀온 그녀를 맞이할 때면 언제나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에게 잔소리를 던지기도 했고, 불과 몇 년전의 자기처럼 뛰어노는 동생의 옷을 깨끗이 빨아주기도 했다. 그녀를 꼭 닮아 밝은 머리카락의 어머니의 팔짱을 끼고 장을 보기도 했고, 그녀와 함께 자란 소녀들과 수다를 떨며 거리를 거닐기도 했다.
익숙한 모습들, 한참 동안 한 번도 꺼내보지 않던 기억들. 마침 밝아오는 햇빛에 눈이 부셨던 걸까, 갈대 끝 간신히 매달린 이슬처럼 촉촉해진 눈가를 여인은 한 번 더 손으로 훔쳤다. 절벽 끝에 매달린 영화주인공처럼 한동안 떨어질 줄 모르던 갈대 끝 이슬도 결국 똑, 바닥으로 천천히 떨어졌다.
“뭐가 보여요?”
마침내 해가 떴다. 먼 하늘, 금빛으로 천천히 물들이던 태양은 기지개를 펴듯 세상에 한 껏 팔을 벌렸다. 한없이 밝아진 갈대밭, 그리고 그 사이로 걸어오는 또 한 명의 기억은 여인의 몸을 의자에서 일으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열린 창문에 몸을 기댔다. 머릿속에 그렇게도 울리던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렇게 한 순간의 기억이 되어 돌아왔다. 깔끔하게 한 쪽으로 빗어 넘긴 검은 머리, 듬성듬성 자라난 수염, 늘 햇빛 아래에 있어서 까맣게 탄 피부와 늘 하얗게 빛나던 미소. 남자는 그렇게 갈대밭 사이에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남자의 곁에는 소년이 있다. 커다란 조끼에 밀짚모자를 쓰고 어색하게 소녀를 바라보던 소년이 소심하게 남자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긴다. 한 걸음. 키가 훌쩍 커버린 소년에게 어느덧 조끼는 작아 단추조차 잠기지 않는다. 한 손에는 이름 모를 들꽃이 한 다발 들려있고, 금발의 소녀는 수줍게 그 꽃을 받아 들었다. 밝은 햇살 사이로 또 눈부신 한 걸음. 혼자 장을 보느라 무거운 소녀의 짐을, 또 한뼘 키가 큰 소년이 뺏어들며 앞장서서 걸어간다. 당황스러운 척 잠시 주위를 살피던 소녀는, 종종걸음으로 그 소년을 따라간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갈대밭 사이로 또 한 걸음. 구두와 각반, 딱 맞는 셔츠와 조끼까지 차려입은 청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색한 걸음걸이로 소녀의 손을 잡았다. 어설픈 한 마디, 또 어색한 한 마디. 어쩔 줄 몰라하는 소녀의 앞에 그는 무릎을 꿇고,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꺼내든다. 기대에 찬 표정으로 반지를 소녀의 손에 끼운 그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소녀를 올려다본다.
“뭐가 보여요?”
창가의 여인의 바로 앞에 다가온 남자는 그렇게 물었다. 아직도 이렇게나 선명한 모습으로, 그는 여인의 앞에 다가와 있었다. 숲처럼 일렁이는 갈대밭 사이로, 금빛 햇살을 타고, 또 그 끝에 녹아버린 이슬 안에 그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담아둔 채로.
“당신. 당신이 보여요.”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미소로, 여인은 답했다. 똑, 이미 햇살에 녹아버렸을 이슬이 여인의 발밑에 떨어졌다. 여인은 창가에 양 손을 짚은 채로, 그렇게 한참동안 갈대밭을 바라봤다.
해가 조금 더 까치발을 들고, 바람이 몇 번인가 일렁이고. 그리고 그렇게 남자는 사라졌다. 여인의 머릿속을 몇 번이고 울렸던 목소리도 희미해졌고, 그저 갈대만이 별 다른 일 없이 춤을 출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몰아쉬던 그녀가 숨을 고르기 시작한 건 그렇게 한참이 더 지나서였다.
여인은 그렇게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갈대 끝에 달린 이슬이 내일도 남아있길, 며칠 뒤, 몇 주 뒤, 그렇게 먼 미래에도 계속 매달려 있길. 그 안에 담긴 모습들 하나하나 멀어지지 않길, 눈물에 담긴 세상처럼 흐려지지 않고 오래도록 선명하길. 오랜만에 돌아온 이 곳에서, 몇 번이고 돌이킬 그 장면들이 잊혀지지 않길. 여인은 그 모든 기도를 담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