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편 단편 소설
"안녕하세요."
문을 열고 첫 걸음을 떼자마자 나를 반긴 건 삐걱거리는 소리였다. 행여 바닥이 꺼지진 않을까, 두번째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움직일 때 쯤, 엉덩이를 잔뜩 빼고 눕듯이 자리에 앉아있는 사서가 나를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꾸벅, 인사를 하고 도서관을 걸어들어갔다. 낡은 바닥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신음소리를 흘렸지만 그마저도 몇 걸음 가다보니 금방 익숙해졌다. 꽤 오랜만에 다시 찾았던 터라, 나는 모교에 돌아온 졸업생처럼 괜히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천천히 발을 옮겼다.
올 때마다 조금씩 바뀌던 도서관이었다. 처음에는 한 평 남짓하고 책장도 두어개에 불과했던 방은 어느새 웬만한 프랜차이즈 카페보다도 커져 있었다. 사람 키만한 사다리를 타야 갈 수 있는 높이의 책장도 수십 개인데 대부분 장서가 가득히 꽂혀있었다. 손 때 가득 타 표지가 너덜거리는 책, 참 깨끗한데 먼지만 소복하게 쌓인 책. 나는 하나하나 정성스레 눈으로 훑으며 인사를 건넸다. 잘 있었니, 얘들아.
사실 이 도서관에 들어온 책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전부 내가 읽었던 이야기들이라는 것. 읽으면서 울기도 웃기도 많이 했던 이야기들이 각자에게 어울리는 표지를 입은 채 고스란히 이 도서관에 자리잡고 있었다. 어떤 책은 수십 번도 더 넘게 꺼내 읽었고, 어떤 책은 한 번 읽고 다시 꺼내 본 적 없기도 하고. 다만, 그 어느 책도 소중하지 않은 건 없었다.
마음이 울적해질 때마다, 내가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할 때마다. 나는 이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읽었던 책을 또 읽는 것도 좋았고, 낡은 종이 냄새도 좋았다. 평소에는 잔소리 많은 사서도, 내가 비좁은 책장 사이에 기대 책을 읽고 있을 때는 말을 걸지 않는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이 곳에서 나는 마음껏 옛 이야기들을 돌이키며 울었던 이야기에 웃고, 웃었던 이야기에 울어볼 수 있었다.
그렇게 또 책장 사이에 숨어들어갈 때쯤, 문득 못 보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엄밀히 말하면 굳이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책이었다. 보통은 그런 책들은 사서가 따로 모아서 정리를 해 두는데, 이 녀석은 실수로 빠뜨린 듯 했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선명하고 깨끗한 빨간색 표지에, 얼룩 하나 묻지 않은 하얀 속지.
“저기요!”
아무도 없었지만 사서가 그 부름에 응답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귀찮은 듯한 한숨 소리, 슬리퍼를 질질 끄는 소리, 그리고 몇 번의 헛기침 후에야 사서는 반쯤 감긴 눈으로 나타났다.
“이 책, 빼주세요.”
평소라면 친절히 부탁했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지금까지 귀찮은 모습을 보여도 장서관리를 잘해준 사서였지만, 지금 이 책의 발견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지탄받아 마땅했다. 이토록 보는 것만으로도 힘든 책을 굳이 잘 보이는 책장에 꽂아둔 이유가 뭐란 말인가.
“네?”
“책 빼달라고요. 내다 버리든, 태우든.”
잘 하지도 않던 강한 말투를 꺼내들자니 목소리가 떨려왔다. 차마 책 든 손이 떨리는 모습은 보이기 싫어서, 나는 얼른 빨간 책을 사서에게 넘겼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함을 눈치챈 것인지, 그녀는 정수리에 끼워둔 안경을 다시 내려 쓰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리저리 책을 살피던 그녀의 입에서는 앞서 나왔던 말들처럼 너무나 기계적인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거 못 버려요.”
“왜요?”
“이 책 시리즈라. 버리실 거면 시리즈 다 같이 버리셔야 해요.”
그런 법이 어딨어?
“다 확인 해보시겠어요?”
“그런 법……. 네.”
마음의 소리를 굳이 꺼내어 따지고 싶었지만, 짜증 섞인 사서의 말투에 짓눌려 나는 엉겁결에 대답을 흘렸다. 허나 그 대답이 오히려 사서의 짜증을 부추긴 셈이 됐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내 책장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도서관 구석구석에서 슬리퍼를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후에, 나는 넓은 책상위에 빼곡히 쌓인 수십 권의 책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처음 찾은 빨간 책 옆에는 크기도 색깔도 다양한 수십 권의 책들이 아무렇게나 쌓여있었다.
“이게 다 같은 시리즈에요?”
“네. 읽어보고 말씀 해주세요.”
사서는 툴툴대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미안한 눈길로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하나로 이어지는 이야기라고는 생각지 못할만큼 책들에 남겨진 흔적은 참 다양했다. 표지가 다 헤져 머릿말로 시작하는 책도 있는가 하면, 아까의 빨간 책처럼 손길 한 번 닿지 않아 깨끗한 책들도 있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파란색 표지의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갓 난 아이를 안아들 듯 한 손으로 안고 조심스럽게 종이를 넘겼다. 한 장씩 펄럭, 펄럭. 그리고 이내 부채질하듯, 여러장을 차르르륵.
사실 다 아는 이야기였다. 주인공은 행복했다. 하늘을 날고, 구름 위를 걷기도 하며 때로는 손을 마주잡고 때로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작고 못난 손은 포근한 손수건이 되어 눈물을 닦아줬다. 거칠고 까무잡잡한 그의 얼굴을 하얀 손이 더듬었다. 그렇게 소년이 겪고 느낀 세상이 고스란히, 그 책에 담겨있었다. 간 밤에 온 비 그치고 난 뒤 처음 맡는 아침의 비내음, 수평선 너머 지는 노을과 귓가를 울리는 바람소리, 얼굴을 제멋대로 덮치는 부서진 파도의 촉촉한 가루, 남색 이불 덮은 하늘 위 반짝이는 별들.
손은 어느새 제 멋대로 다른 책들을 휘적이고 있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아름다운 이야기의 연속. 꿈같은 이야기였다.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하고, 되고 싶은 사람을 멋대로 정하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더벅머리, 키도 자그마한 소년이 그 시리즈에서는 당당한 주인공이었다. 완벽하고, 흠잡을 데 하나 없는 주인공.
“버리실 거에요?”
감정 하나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멀리서 들리는 듯한 그 부름에 나는 간신히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와야 할 목소리는 아직 옷을 갈아입는지 꾸물거리기만 했다.
“아뇨.”
한참이 지나서야 목소리가 간신히 새어나왔다. 조그마한 입이 비집고 나오기 그렇게도 좁았는지, 힘없이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를 나는 간신히 붙잡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거, 하나로 모아주세요.”
나는 사서가 책들을 묶는 걸 오래도록 쳐다봤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을 위해 꼭 해야 할 일이었다. 다른 책들과, 또 다른 시리즈와 헷갈리면 안되니까. 나는 번거롭지만 굳이 빨간 책을 가장 앞으로 보이게 묶어달라고 주문했다. 혹시나 또 읽고 싶어지면 그 마음 꾹 눌러 담을 수 있게.
가질 수 없어서 더 아름다운 것들이 있듯이, 돌아보지 않아야 아름답게 남는 추억도 있는 법이다. 이야기는 그리워지겠지. 언제 다시 마주칠 수 있을지 모를 이야기들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사서가 책 한 무더기를 구석에 꽁꽁 묶어두는 걸 바라보고만 있었다. 원래, 한 번 읽은 이야기보다 처음 읽는 이야기가 재미있는 법이니까. 주인공이 더 이상 완벽하지 않더라도, 더 이상 그가 겪는 세상이 아름다움 가득하지 않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