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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아주머니를 만나다

by 사색의 시간

주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흔했던 세븐일레븐도, 경찰서도 없었다. 길과 바다뿐이었다. 화롄 표지판이 나온다. 지도상으로 화롄시까지 30km 정도 가야 하는데, 30km를 달리기엔 많이 늦었다. 저녁 여섯 시가 넘었고 해가 지는 중이었다. 일단 표지판을 따라 화롄 방향으로 달려본다. 중간에 뭐라도 나오기를 빌면서.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는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어쨌든 움직여야 했다. 조금만 안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쉽게 좌절하고 방구석에 쭈그리고 있던 나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처음에는 우울한 상태에서 몸을 움직이는 게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숱한 셀프 다독임을 거치면서 다리 하나, 팔 하나, 겨우 겨우 옮겨놓았다. 알게 된 건, 일단 자전거 위에 오르고 나면 그런 생각은 바람에 씻겨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과 다르게 실제로는 잘 풀릴 수 있다는 것. 지레 난 안될 거야 하고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 나의 전매특허였는데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동안은 그런 자세를 약간이나마 버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몸을 움직이는 게 쉬워지는 건 아니었다. 날마다 문 밖으로 나가기가 괴로울 만큼 어려웠지만, 그래도 다행히 여행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페달을 밟는 동안은 걱정을 잊고 풍경에 즐거워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고되고 힘들고 지치면서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자전거 여행이 아니었다면, 자전거를 타는 시간이 없었더라면, 호텔방에 쭈그린 채 그대로 여행을 마쳐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로등이 켜졌다. 해가 완전히 져버린 시각. 혹시나 해서 챙겨 온 전조등과 후미등을 생각보다 자주 꺼내 쓰게 되었다. 표지판에는 <북회귀선>이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북회귀선 공원을 가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지나치는구나. 멀찍이서 북회귀선을 알리는 탑을 보는 것으로 만족한 채 계속 달려야 했다. 열대와 온대를 경계 짓는 북회귀선 지역은 햇빛이 수직으로 쏟아져내린다고 한다. 수직으로 쏟아져 내리는 햇빛은 훨씬 더 뜨겁고 강렬할 것만 같다. 밤에 북회귀선을 지나는 것이 아쉽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했다. 북회귀선을 지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달렸다. 휴게소인지 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주위에 숙소 같은 거 있을까요?”

-안녕. 나도 여기 놀러 온 거라서 잘 모르겠어. 이 주위엔 식당도 숙소도 잘 없는 거 같던데. 우린 관광버스 타고 와서 곧 다른 데로 갈 거거든.

그다음엔 조그만 슈퍼 앞에서 생선을 구워 먹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무리를 만났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중국어는 옛날 억양인지 타이완 억양인지 어조가 세고 낯설어서 알아듣기 어려웠다. 할머니는 나를 도와주려고 열심히 이것저것 설명해주셨다.

-이 마을엔 잘 만한 곳이 없는데. 화롄까지 가야 해, 우리 할아버지한테 데려가 달라고 할까?


괜찮다고 하고서 다시 달렸다. 나중에 보니 할머니가 데려다주겠다고 한 곳은 마을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었다. 여길 어떻게 데려다주려고 하셨던 걸까. 그들의 마음이 순수하고 고마워서 웃음이 났다. 겨우 몇 군데를 수소문하여 숙소를 찾았으나 1박에 2000 타이안 위엔. 한국돈으로 7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이다. 하루쯤 호사를 누린다고 생각하고 머무를 수도 있었을 텐데, 500위엔짜리 숙소를 전전하던 나는 이왕 헤맨 거 조금만 더 찾아볼까, 조금만 더, 하면서 더 깊숙한 산골로 들어가고 있었다. 완전히 깜깜한 밤이 되었다. 식당이 없어 저녁도 먹지 못한 상태. 사람이 보이는 대로 붙잡고 물었으나 대답은 한결같았다. 이 동네에는 숙소가 많이 없고 있는 것들도 연휴라 방이 찼거나 가격이 비쌀 것이다. 어떡하지. 어디서 자지. 페달을 굴리면 굴릴수록 더 어둡고 더 조용한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앞에서 생강에 묻은 흙을 씻고 있는 아저씨가 보였다. 아저씨는 자초지종을 듣더니 아주머니를 불러냈다. 그분이 바로 수 아주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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