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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안 받을 테니 며칠 더 있다가!

by 사색의 시간

조그마한 체구에 다부진 눈빛을 한 아주머니가 내 앞에 섰다.

-이 주변엔 잘 곳이 없어. 우리 집에서 자, 어차피 지금 돌아다녀도 잘 데 못 구할 거야. 들어와.

이런 상황을 여행기에서 본 적이 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자전거로 여행을 하다 보면 더더욱, 낯선 사람의 집에서 자는 일이 생긴다. 여행기를 읽으면서 생각했었다. ‘무섭지도 않나? 위험하면 어쩌려고 낯선 사람 집에 들어가는 걸까.’ 막상 내가 그 상황에 닥치니 무서움보다는 고마움과 안도감이 컸다. 믿느냐 마느냐. 안전과 직결된 아주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다. 이때까지 만난 타이완 사람들이 전부 친절했다던가 인상이 좋아 보인다든가 하는 것들은 소용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주머니와 아저씨를 믿기로 했다. 그 시각에 라이딩을 강행하는 것이 더 위험할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수 아주머니는 내가 묵을 방을 안내해주셨다. 아주 큰 집이었다. 자식들이 다들 결혼하고 집을 떠나 빈방이 많다고 하셨다.


-배고프지? 우리도 막 저녁을 먹으려던 참이었어. 일단 씻고 와. 준비는 아저씨가 다 할 거야.

나는 주섬주섬 자전거와 짐을 풀고 샤워까지 했다. 아저씨가 직접 만든 거라며 이것저것 맛있는 것들을 잔뜩 내오셨다. 채소무침 몇 가지와 연어 절임. 연어 회를 숙성해서 갈색으로 변한 것이었는데, 처음 먹어보는 오묘한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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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이니까 술도 좋아하지?

아저씨가 부엌에서 와인 한 병을 꺼내오셨다. 한국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심어주기는 싫었는데 하필 나는 술을 좋아했다. 매일 장시간 자전거를 타다 보니 컨디션 관리를 위해 타이완에 와서는 한 번도 술을 마시지 않았다. 술을 보자 눈이 반짝 뜨였다. 연어 절임에 와인 한 잔. 오랜만에 마시는 술은 정말이지 달콤했다. 아저씨는 매운 것을 좋아하신다며 직접 만든 매운 양념장을 먹어보라고 하셨다. 한국 사람이니까 매운 거 좋아하지? 하필 나는 매운 걸 무지하게 좋아했다. 아저씨가 만든 양념장은 매콤하니 정말 맛있었다. 타이완에서 와서 음식이 맞지 않아 고생하고 있었는데 양념장 하나에 밥 한 공기를 정신없이 비웠다. 불과 몇십 분 전 처음 와본 마을인데, 이렇게 따뜻하게 환대해주시고 정성스러운 음식을 내어주시다니. 따뜻하다 못해 후끈한 밤이었다. 술이 올라와서였을까.


동네 산책 가자. 식사를 마치고 수 아주머니가 밖에 나가서 걷자고 하셨다. 옷을 챙겨 따라나섰는데, 알고 보니 수 아주머니께서 이웃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해주고 싶으신 모양이었다. 불 켜진 가게마다 들어가 ‘인사해, 우리 집에 온 한국인이야. 내가 오늘 하룻밤 재워주기로 했어!’ 하면서 이웃 주민들에게 나를 소개해주셨다. 내가 수 아주머니를 만난 것이 신기하고 특별하듯 수 아주머니께도 나와의 만남이 작은 이벤트가 된 것 같았다. 수 아주머니를 따라다니며 집집마다 인사를 하러 다녔다. 어떤 집은 노래방 기계를 틀어놓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어떤 집은 아기와 놀고 있었다. 타이완 동부 작은 마을의 저녁 풍경을 속속들이 볼 수 있었다. 과일 가게 아주머니 자신을 원주민이라고 소개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특별히 그런 말이 없었는데, 원주민은 꼭 원주민을 소개하곤 했다. 타이완에서 버스를 타면 안내방송이 세 가지 언어로 나온다. 중국어, 타이완어, 객가어(사투리의 일종). 종종 이들의 언어와 부족의 다양성을 접할 때마다 타이완이란 어떤 나라인지 복잡한 느낌이 들었다. 동네 사람들과의 인사를 마치고 와서 과일을 깎아 먹었다. 아저씨와 타이완 역사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저씨는 간간히 슬픈 표정을 짓기도 했다. 자전거로 타이완을 한 바퀴 돌면서 곳곳의 풍경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가 더없이 귀중한 경험이었다.


돈 안 받을 테니 며칠 더 있다 가! 다음 날 아침 채비를 하는데 화통한 수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잘해주셨기에 며칠 더 있다 갈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지금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문 앞에서 오래오래 손을 흔들어주셨다. 정말, 언젠가, 화롄으로 가던 길목의 그 작은 마을을 다시 찾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 수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나를 반겨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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