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5일은 그리 멀지 않게 느껴진다
나는 지금 매우 만족스러운 상태다. 짜파게티 하나를 끓여먹고, 복숭아까지 하나 먹었기 때문이다. 올해 복숭아가 정말정말 맛있다. 농부님들께 감사드린다.
글 하나 올리면 구독자 한 분이 떠나간다. 그분들께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 타인에게 읽을만한 글, 도움이 되는 정보 등등을 어떻게 쓸 수 있을 것인가 나름대로 고민해보기도 하였으나 고민할수록 내가 쓸 수 있는 글이란 시시콜콜한 신변잡기에 지나지 않겠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1년 후 나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었다. 혼불문학관에 갔을 때 거기서 1년 후 나에게 편지를 쓰면 1년 후에 집으로 보내준다고 했다. 거기서 썼던 편지가 1년 후 정말로 우편으로 왔다.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1년 후에 내가 뭘하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요지였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기억에 남는 건, 그때 혼불문학관과 주변 일대를 걸었던 순간들이다. 그거면 됐다.
지금 이렇게 조그만 나만의 방에 앉아 뭔가를 쓰는 날도 일년 뒤에 기억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노트북을 켰다.
그때쯤이면 어느정도 길을 찾았을지, 여전히 고군분투 중일지 모르겠다. 1년 동안은 일을 구하지말고 스스로의 시간을 가져보자, 라는 약속을 깨고 조급함에 이미 직장을 다니고 있을지도 모르겠고. 이번에 결정을 내리면서 여러가지 두려움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2017년과 자꾸 비교를 하게 되서였다. 그때 스스로의 시간을 가지면서, 힘들었던 거 같아서. 또 그때처럼 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컸다.
그동안 나를 대하는 자세는 '체념' 이었다. 다그치고, 다그치고, 다그치고, 결국에 가서는 체념한다. 설사 많은 것들을 해냈더라도 말이다. 실제로 내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디에 다다랐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다그침과 체념은 그냥 패턴이었으니까. 패턴이 계속 반복될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뭔가 결과물을 내놓고도 뿌듯함이나 기쁨을 누릴 수가 없었다. 이미 체념했으니까.
왜 그랬을까? 거절 당하기 전에 미리 체념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업체에 기획서를 보내놓고, 그쪽에서 거절하기전에 '난 안될거야'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거절이 아프지 않나? 그것도 아니었으면서.
엄마에게 어려운 부탁을 했을 때 엄마는 '어쩔 수 없지.' 라고 말했다. 헷갈렸다. 그래서 들어준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어쩔 수 없다는 게 무슨 뜻이지? 그리고 허탈했다. 들어주고 싶어서 들어주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들어주는 거구나. 그게 나에겐 충격이었다. 결과적으로 도움을 받았는데도 고맙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그 말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지. 그 말을 하고 나면 아무 것도 하기가 싫어졌다.
일년 동안 내 자신을 그렇게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년 후에는 그 말을 잊었으면 좋겠다.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진짜 좋아서 하는 경험과 기억들을 쌓아나가기를 바란다. 그러려고 직장을 그만두고 카메라를 사고 책을 읽는거다.
일년 후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은,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운 순간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거다. 비가 오면 창문에 부딪치는 빗소리를 듣는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느낀다. (물론 내 집은 아니지만) 여름밤 길거리를 누군가와 함께 걷고, 그 사람의 입술이 내 귓가에 가까이 와서 '머리 진짜 짧게 잘랐다'고 속삭였던 적도 있었다. (과거형임) 머리 짧게 잘랐다는 말이 기억에 남은 이유는, 머리를 짧게 잘라서 그 사람이 날 예쁘게 보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짧게 잘라도 나를 예쁘게 보는 사람이 있다는 걸 까먹지 말자.
뭘하든 괜찮으니까, 스스로를 잘 챙기자. 이번 일년은 뭔가를 하라고 하지 않을거다. 좋아하는 거라고 해도, 하든 말든 중요하지 않다. 이 시간동안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태하는 태도다. 내가 나한테 많이 많이 느슨해지면 좋겠다. 이러다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안에서 편해지는 법을 배울 거고, 그러면 알아서 풍요로워 질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