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하는 게 아니고 못하는 거지만
1
근무 중에 생각했다. 이제 더이상 남의 속도로 살지 못하겠다고.
호주에서 늘 품었던 의문이 있었다. '왜 여기서 나는 편안하지?' 그건 속도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호주가 느린 곳이라는 뜻은 아니다. 서로의 속도를 존중한다는 뜻이다. 너는 느리고, 쟤는 빨라. 이런 잣대조차 없었다.
한국은 빨리! 빨리! 모두 빨리! 더 빨리! 이런 느낌이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빨리 하지 않을 것이다.
2
백수가 되기로 하면서 두려웠던 것 중 또 하나가 '영원히 백수로 살면 어떡하지?'였다. 오늘은 그 두려움을 들여다보고 다독이는 시간이었다. 아니야. 꼭 그렇게 되라는 법은 없어.
중요한 건 내 마음가짐이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앞으로도 계속 백수로 살고 싶을까봐' 두려운 거였다. 음. 글쎄. 살다보면 언젠가 이 생활이 지겨워져서 손을 떼는 날이 오려나?
3
지나간 것은 미화된다. 과거를 돌아보며 느꼈다. 당시에는 전혀 아름답지 않았던 것들이 아름답게 보였다. 그 속에 있던 내 모습들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내 스스로에게 엄청 가혹한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재차 깨달았다.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데. 뭘 그렇게 잘해볼거라고 덕지덕지 많이도 붙여놓았었는지.
아빠가 생각났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내게는 언제나 아빠였던 그 사람이 사실은 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아빠에게 무척 미안했다. 나는 아빠에게 무얼 그리도 바랐던 걸까? 아빠가 자식인 내게 그랬듯이, 나 역시 아빠에게 맹목적인 요구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았다. 내 속에서 아빠를 이루고 있던 자질구레한 것들이 떨어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때와 비슷한 기분이다. 내가 나라는 이미지를 만들면서 여기저기 갖다붙였던 자질구레한 것들이 떨어져나가는 느낌이다. 시간에게 감사했다. 시간이 흐르지 않았더라면, 지나간 시간 속에서 나를 되돌아볼 수도 없었을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