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태도

by 사색의 시간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걷는 밤거리에서는 더위마저 달콤했다. 돈 없어도 좋다고 신나하는 내 자신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이렇게 좋다는데 당분간은 하고싶은대로 살게 두자. 체념이 아니라 독려와 믿음의 자세로 스스로를 바라본다.


백수가 되자마자 내가 한 일은 어렸을 때 좋아했던 연예인들의 근황을 검색해보는 거였다. 왜 그랬는진 모르겠는데 그 사람들 생각이 났다. 그들의 근황을 찾아보면서 '와 어떻게 아직까지 활동을 하고 있지?' 감탄했다. 꾸준함도 꾸준함이지만, 사실상 그들의 전성기는 20년 전이다. 전성기가 지나간 이후의 우울과 공허함 (있었는지 어쨌는지 나는 모르는 일이지만) 이 어떻게 되었든간 계속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결론은 존버가 답이라는 거다.


본의 아니게 2017년에 백수였던 나와 앞으로 백수로 살아갈 나를 많이 비교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 아침에 눈을 뜨던 감각, 모두 출근하고 조용해진 동네에서 밥을 지어먹던 감각. 그런 것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2년 전에는 무력감으로 많이 힘들기도 했었다. 온종일 누워서 유튜브만 보던 시기도 있었는데 그때 나를 일으킨 영상이 있었다. '변하고 싶으면 이불부터 개라' 뭐 이런 영상이었던 것 같은데...2년 전에 그걸 본 덕분에 지금은 일어나면 바로 이불을 갠다. 2년전 보다 나는 나아졌다. 그리고 더 넓은 책상과 더 좋은 의자에 앉아 있다. 그걸 기억하면 좋겠다.


나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자고 마음 먹으니 바로 뒤따라 오는 변화는 돈에 대한 태도였다. 2017년까지 돈은 내게 괴로움의 대상이었다. 없어서 괴롭기도 했지만 소비가 괴로웠다. 돈을 쓴다는 게 나에겐 커다란 죄책감이었기 때문이다. 중학생 땐가 고등학생 땐가 처음으로 던킨 도너츠를 가봤던 날 코코아를 마시면서 울었다. 나만 이렇게 달콤한 걸 먹어서 미안해 엄마...뭐 이러면서 울었던 거 같다. 지금 생각하면 당혹스럽다.


2018년에 호주로 가게 되면서 1달러가 얼만지 환산이 안되서 돈개념이 아예 없어졌을 때, 나는 아무 생각없이 돈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과소비를 한 건 아니다. 퇴근길 구찌 매장 앞에는 늘 엄청난 줄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 줄에 슬쩍 서보기도 하였으나 구매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냥 먹고 싶은 걸 먹고, 여행하고 싶은 곳을 여행했다. 그렇게 쓰고 싶은대로 돈을 쓰면서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참말로 개운했다.


근데 다시 한국에 왔더니 스멀스멀 죄책감이 고개를 드는 것 아닌가. 이래선 안되겠다 싶었다. 예전같이 되기는 싫다. 그렇다고 호주에서처럼 1만원이 얼만지 모르는 채로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도대체 돈을 어떻게 대해야 되는가? 나름대로 고민했다. 첫번째로 떠오른 건 '돈을 쓸 때 기뻐하라'이다. 그말인 즉슨, 나를 기쁘게 하는데만 돈을 쓰라는 거다. 그리고 기쁨에 집중하라는 거다. 립스틱을 사면 기분이 좋다. '아..립스틱 이미 있는데' 이런 생각은 하지 말자. 그런 생각할거면 사지를 말자. 두번째는 돈에 감사하기. 돈이 있어서 책상도 사고 의자도 살 수 있었다. 비싸서 마실 수 없다고 참았던 덴마크 드링킹 요구르트도 사서 마셨다. 맛있었다. 다 돈 덕분이다. 일단 이 두 가지 태도로 돈을 대해보기로 했다.


그 다음 생긴 변화는 술에 대한 태도였다. 정말...나는 술을 좋아해서 큰일이다. 늘 그렇게 생각했다. 음주 다음날이면 '아 이제 절대 술 안마셔'라고 생각하는데, 그 생각이 술 절대 못 끊을 사람의 생각 같아서 소름이었다. 안주를 거하게 차려 먹는 편이어서 술 마시면 안주값까지 돈이 많이 깨졌다. 한국에서도 호주에서도 내 지출의 반 이상은 술과 안주였으리라...


그런데 백수가 되고, 살고 싶은대로 살려니 이게 문제가 되었다. 술을 마시면 술이 어느 정도 깰 때까지 깨어있는 편인데 그러다보니 늦게 자게 되고, 다음날 지장이 온다. 숙취 때문에 힘들다. 회사를 다니면 힘든 채로도 출근하면 되는데 백수면 하루종일 드러누워 있게 된다. 술 때문에 돈은 물론이요 시간까지 날려버리게 되는거다. 돈은 내가 먹고 마신거니까 그러려니 하겠는데,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술 때문에 다음날 시간을 낭비하는 게 싫었다. 그러다보니 점점 술을 덜 마시게 되었다. 최근에는 주종을 이슬톡톡으로 바꾸었다. 거한 음식 없이 가볍게 달콤하게 마실 수 있고 그러면서도 엄청 취하는 것도 아닌 술. (2017년에는 여기에 소주를 섞어마시고 술병이 났었지만...) 지금은 술보다는 내 시간을 가지는 게 더 좋다. 이 역시 모닝 막걸리를 들이키던 2017년과는 사뭇 다르다.


예전처럼 되는게 두려웠는데 글로 쓰고나니 예전보다는 잘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버하지 않는 선에서, 스스로를 피곤하게 하지 않는 선에서 이런저런 다양한 재밋거리들을 찾아가볼 수 있으면 좋겠다. 아! 그리고 백수가 되니까 이제야 춤도 눈에 좀 들어온다. 이제야 춤이 아름다워보인다. 다시 춤을 출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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