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베리 설탕 절임

by 사색의 시간

비 핑계로 하루 이틀 운동을 안갔더니 바로 신호가 온다. 신호가 온 곳은 허리도 아니고 무릎도 아니고 뱃살도 아니다. 멘탈이었다. 증말...나약하고 형편없다.


잠을 잘 못잤다. 뭘 하느라 그런 것도 아니고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그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그러다보니 당연히 생활 리듬도 엉망이 되었다. 역시 나를 규칙적으로 생활하게 만드는 건 출근 뿐인가 하면서 구직사이트를 뒤지다가, 아니야! 가기 싫어! 하면서 집어치우는 일은 지겹지도 않은지 계속 반복되었다.


오늘도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있으면서 아무것도 못하다가 '이렇게 있으면 안되겠다' 싶었다. 얼마 전에 산 블루베리가 냉장고에 있다는 걸 떠올렸다. 냉동실에서 블루베리를 꺼내 그 위로 설탕을 가득 부었다. 그리고 그걸 냄비로 옮겨 끓이기 시작했다.


요즘 내 도피처는 부엌이다. 원룸에서 부엌이래봤자 책상에서 한 걸음 떨어진 곳이지만. 그래도 아무생각없이 재료를 썰고, 고기를 볶고, 면을 삶다보면 어느새 기분이 좀 나아진다. 2017년에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여행을 많이 했다. 2019년에는 요리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요리를 많이 한다.


잼을 만드는건지 청을 만드는건지도 모른 채 냅다 과일과 설탕을 끓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게 뭐가 되려나 했는데 끓일 수록 점점 뭐가 되어 가는 것 같았다. 달콤한 향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과육이 적당히 풀어지고 농도가 걸죽해졌다.


젓던 나무 수저를 들어 맛을 봤다. 달콤한 맛이 혀 위로 퍼졌다. 그때 놀랍게 기분이 좋아졌다. 약간의 단맛으로 기분이 이렇게 나아질 수 있다니. 초코바를 먹으면 되지 않냐고? 안 된다. 이건 뭐라고 해야 되나...단순한 단맛이 아니다. 스스로 뭔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이 들어있는 단맛이다.


오늘 두 개의 메시지를 받았고 둘 다 내용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호의적이고 나를 응원하는 메시지였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절망 중이다. 나가자. 운동을 하러 가자. 다녀 오는 길에 탄산수를 사서 내가 만든 정체불명의 블루베리 엑기스를 넣어 마셔야겠다.



+ 브런치 키워드 웃기다 자기 맘대로 이 글 키워드를 '다이어트'로 설정했다. 어딜 봐서 다이어트지? 블루베리 때문인가. 아무 생각 없이 눌렀다가 키워드 수정하러 다시 들어옴. 이 글은 다이어트와 무관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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