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것은 결국 살아남는다

검은 목폴라티 생존기

by 사색의 시간

방이 엉망이 된 건 세탁기에 넣은 니트 때문이었다. 니트에서 빠져나온 털이 다른 빨래를 못 쓰게 만들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니 이 빨래들을 건조기에 돌리면 털이 말끔하게 떨어져 나간다고 했다. '이것들을 들고 건조기가 있는 빨래방에 가야겠군'. 그런 생각으로 건조대에 널린 빨래를 며칠이나 방치해두었다. 빨래방에 가져갈 것들이니 굳이 갤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빨래 건조대가 널린 방은 금세 다른 것들이 방에 여기저기 널리는 것조차 허용했다.


그래서 어쨌냐면 엉망이 된 빨래들을 그냥 버리기로 했다. 빨래방에 가는 게 뭐 그리 어려운지 나는 그렇게 극단적이다. 빨래방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다는, 세 살배기 아이도 안 할 것 같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그런 결정이 가능했던 이유는 엉망이 된 빨래들이 이미 형편없는 옷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의복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편이어서 싸구려를 사서 마구 입었다. 그런 것들을 살리자고 빨래방에 가는 수고를 들일 필요는 없다고 내 마음은 일찍이 결정한 모양이었다. 그럼 나도 빨리 좀 알려주지 계속 빨래 건조대를 펼쳐두고 빨래방에 가야 한다고 스스로를 재촉하게 내버려 두다니.


여하튼 나는 그렇게 형편없는 데다가 니트 털이 잔뜩 붙어 엉망이 된 빨래를 미련 없이 처분했다. 그런데 그중에 딱 하나. 검은색 목폴라티가 눈에 밟혔다. 비싸지는 않지만 올 겨울 무척 잘 입었던 옷이었다. 하나만 입어도 깔끔하게 맵시가 살았다. 그것을 입었을 때 드러나는 몸의 라인이 마음에 들었다. 많이 추운 날에는 안에 그걸 입고 위에 조끼든 스웨터든 가디건이든 무엇이든 껴입으면 그만이었다. 예쁘면서도 든든한 아이템이었다. 나는 검은색 목폴라티를 슬쩍 옆으로 빼두었다. 그리고 의외로 상태가 심하지 않아 살릴 수 있을 것 같은 것들도 몇 개 더 빼두었다.


물에 담갔다가 살살 손빨래를 해서 털을 제거해야겠다. 그런 심산으로 빼둔 것들은 나의 귀차니즘을 극복하지 못하고 또 처분당할 위기에 처했다. 세탁기에 남은 털을 제거하기 위해 세탁기 통에 넣고 돌린 스타킹도 처분 대상이었다. 2차 처분에도 검은색 목폴라는 살아남았다. 유일한 생존 아이템이었다.


그래서 검은색 목폴라가 어떻게 되었냐면, 몇 번의 빨래를 거쳐 (물론 귀찮아서 손빨래는 못하고 괜찮아질 때까지 세탁기에 시달린 결과) 살아났다. 털이 거의 제거되었다. 음. 이만하면 됐어. 다음 겨울에도 입을 수 있을 것 같아. 혹독한 세탁기 생활에 보풀이 좀 일긴 했지만 그런 건 괜찮으니까.


드디어 빨래 건조대를 접을 수 있었던 나는 속히 방청소를 시작했다. 그리하여 오늘, 깨끗한 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만세. 쓰고 보니 이 무슨 멍청함과 우유부단함과 게으름의 대환장 파티인가 싶다. 니트 빨래부터 방이 치워지기 전까지 총 2주 넘게 걸린 일이다. 이번 사건으로 느낀 게 있다면, 앞으로 옷을 사게 된다면 살아남을 옷을 구비하자는 거. 옷을 사기 전에 한 번쯤 생각해봐야겠다. 이 아이가 엉망이 되면 나는 이 아이를 살릴 것인지. 살아남을 것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 나도 살아남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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