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를 만났다. 거의 5년 만이다. D와 많은 길을 함께 자전거로 달렸지만 대화를 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자전거를 잘 타는 말없는 아이. 나에게 D는 그런 느낌이었다. 대화할 기회가 없었던 거지 D는 말을 꽤나 잘하는 아이라는 걸 오늘 알았다. 솔직하게 자신의 고민을 꺼내는 모습에 몇 번이나 놀랐다.
D는 선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타인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선. 그걸 기가 막히게 잘 지키며 살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보니 깊은 관계가 없다고 했다.
"그 선을 바꾸고 싶어?"
물었더니 그걸 모르겠다고 했다. 바꾸는 게 좋은 건지 이대로가 좋은 건지. 자기 자신을 잘 모르는 기분이라고 했다.
"저는 그래서 누나가 신기했어요. 개인적이라서."
남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이 느낀 것에 집중하는 사람. 그게 D가 말하는 나였다. (나는 남을 신경쓰지만 그게 남들 기준에는 현저히 낮은 수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D가 나처럼 되는 것을 원하는 걸까 싶어 나같은 인간의 단점을 알려주었더니 D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말도 없이 자전거만 탔던 우리는 이제야 서로의 첫인상을 나누었다. 그는 나에게 성실한 사람이라고 했다. 돌아보니 정말 성실하게 자전거를 탔다.
그룹 내에서 연애가 끝나면 여자 쪽이 사라지는 경우를 많이 봤다. 그게 싫고 서운했다. 내가 좋아하던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자전거 타는 남자와 헤어졌을 때 '내가 이곳에 남겠다'고 선포했던 것 같다. 그가 나 대신 사라져주었다. 그뒤로도 나는 계속 자전거를 탔다.
D와 나는 더이상 자전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도 나도 자전거를 탈 만큼 탔고 이제 인생에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참이었다. 잡히지 않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게 뭔지는 각자가 찾아야 할 문제지만.
D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와 한숨 잤다. 자고 일어나서는 내일 가려고 했던 풋살을 취소했다. 코로나를 핑계로 대긴 했지만 사실 두려웠던 걸까. D가 "누나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는 것 같아요." 라고 했는데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6월이 온다는 것에 미미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단어 하나하나가 모조리 자신이 없고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곳에 갇혔다는 느낌이 든다면, 절대로 써내지 못할 것 같고 작가로서 소질이 없다는 확신이 든다면, 실패작이 될 게 빤히 보이고 완전히 자신감을 잃었다면 당신은 작가임이 틀림없다. - <네번째 원고> 중
<네번째 원고> 에서 이 부분을 읽으며 '그렇군. 나는 작가군!' 하고 외쳤다. 스스로 끊임없이 작가가 되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작가가 된다는 건 전혀 근사하지 않다. 단어 하나하나가 모조리 자신이 없고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곳에 갇혔다는 느낌이 드니까. 절대로 써내지 못할 것 같고 작가로서 소질이 없다는 확신이 드니까. 실패작이 될 게 빤히 보이고 완전히 자신감을 잃었으니까. 이런 참담한 기분 속에서도 조용히 한 발 한 발 작가가 되는 길을 걷는 중이다. 내 인생 만세. 6월에도 신나는 일이 가득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