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자아 꺼내기

by 사색의 시간

글이 써지지 않는 이유, 사실 알고 있습니다. 내 안의 엄격한 감독관 때문이죠. 글을 쓰는 동안은 감독관과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잘 되지 않았어요. 감독관과 나, 둘의 끈끈한 지배-피지배 관계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문득 이 관계가 조금 이상해보였습니다. 감독관은 나와 분리되어 있는데 창작하는 자아는 나와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창작하는 자아는 나 자체였습니다. 그러니 창작자아는 형편없고, 볼품없고, 못미더운 '나'의 특성을 전부 뒤집어 써야했어요. 그래놓고 감독관에게는 온갖 권능을 부여했으니 게임이 될 수 없었죠.


창작자아를 꺼내기 위한 바이블이 있습니다.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에요. 저는 이 책을 따라 '아티스트 웨이'를 걸어보려고 몇 번이고 도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과제는 탁월하지만 너무 많고 12주는 너무 깁니다. 이 책을 몇 번이나 사고 팔기를 반복했던지. 이제는 거의 아픔으로 남은 책입니다. 마지막으로 중고서점에 팔 때 '봐, 역시 난 안 되잖아. 이제 이 책은 그만 사자.' 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티스트 웨이>가 아니었다뿐이지 저는 계속 비슷한 것들을 찾아다녔던 것 같아요. 글쓰기 수업이나 명상 수업이나 책 만들기 수업 등등...그것들을 들으며 꼬박꼬박 빠짐 없이 과제를 했고 그 기간은 12주를 훨씬 넘었습니다. 많은 수업을 들으며 느낀 것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수업은 남의 전철을 한 번 밟아보는 경험이다. 수업이 끝난 뒤 나만의 작업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게 진짜다."

쉬지 않고 수업 듣기를 이어가는 것이 자기 작업을 회피하는 행위는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저는 회피 전문가입니다.)


어제도 흥미 있는 수업의 커리큘럼을 꼼꼼히 읽던 중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건 남이 만든 순서와 질서다.'

글을 어떻게 읽고 써야하는지, 욕망해야 하는지, 어떻게 자신을 들여다봐야하는지에 대한 커리큘럼은 그 수업의 강사가 만든 것이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노련한 선배가 전달하기 좋게 빚어낸 것을 받아먹는 것도 물론 좋습니다. 하지만 내면에서 '나만의 질서'를 획득하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떤데? 너의 커리큘럼은 뭔데? 너의 질서와 순서는 뭔데?'

오늘 아침 명상 메세지였습니다.


사랑을 주제로 100명이 강의를 한다면, 그 커리큘럼은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제가 만약 A의 수업을 골랐다면 저는 A가 생애를 통해 빚어낸 'A의 사랑'을 배울 수 있겠죠. 저는 그런 것들을 좋아했고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너의 것이 필요해. 내 안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구 목소리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창작자아의 목소리라는 걸요.


왓칭 명상에서 나는 '바라보는 존재'입니다. 그동안 나와 너무나 동일시하는 바람에 보지 못했던 창작자아가 드디어 나와 거리를 두게 되었어요. 저는 이제 감독관을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창작자아의 존재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창작자아가 감독관과 대등한 위치에 섰습니다. 나와 동일시된 창작자아 였을 때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죠.


다행입니다. 내가 창작자아가 아니라니. 그러면 창작자아는 더이상 형편없지도 볼품없지도 나약하지도 않다는 거니까요. (여기서 '나'는 에고의 목소리겠네요.) 조금씩 창작자아와 놀면서 시간을 보내는 법을 익혀볼 요량입니다.


"너는 뭘 하고 싶니?"

"일단, 춤을 좀 추자."


창작자아가 춤추기를 원하는군요. 이 자아에게 글을 쓰라고 다그치지 않을 겁니다. 춤추게 하고, 게으름 부리게 하고, 하고 싶은대로 하게 내버려 둘겁니다. 그러다 어느 날 글이 쓰고 싶다고 하면 "왠일이야?"하며 책상에 슬쩍 앉아보려고 합니다. 오래 오래 갇혀 있었으니 창작자아의 말처럼, 일단 좀 놀아야겠죠. '그동안 논 건 뭔데?' 감독관의 목소리가 들리는 군요. 괜찮습니다. 저는 창작자아의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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