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망 잡동사니들도 굿바이
'책을 읽고 나서 그 책을 버릴 수 있다면 당신은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있다.'
미니멀리즘과 관련된 정보가 모여 있는 대표적인 웹사이트 'bemorewithless.com'에는 '당신이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있는 25가지 이유'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 있다.
그중에서도 내 눈에 들어온 대목은 바로 이 한 줄이다. 책을 소유하지 않는다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한 번쯤 해볼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한 달의 미니멀 게임을 완료해 버리기 능력치가 향상됐다는 점을 감안해 주시라).
사실 이 항목을 제외한 24가지 항목 중에 내가 해당되는 바가 없었을 뿐 아니라 당장은 원하는 바도 없었다. 그나마 미니멀 라이프를 동경하는 자로서, 책 버리기가 가장 접근하기 쉬운 항목이었을 뿐이다. 이 리스트는 초보 미니멀 라이프 도전자인 나에게는 꽤나 어려운 도전 과제에 가까웠다. 의욕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사기를 꺾는 쪽에 가까웠다고 해야 하나. 다른 항목을 몇 가지만 더 소개해보자면, '100가지 미만의 물건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에게 흥미가 있다면 당신은 미니멀리스트 일지 모른다' '장신구와 기념품이라는 단어가 당신을 싫증 나게 한다면 당신은 미니멀리스트다' '옷장에 옷이 33벌 미만이면 당신은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있다' 정도였다. 음, 역시 아직도 와 닿지 않는다.
그래도 책을 버리자는 결심을 하게 된 것 자체가 나에게는 꽤 큰 발전이다. 책을 읽는 것을 무척 좋아하기도 했고, 그래서 당연하게도 소유하려는 욕심이 많았다. 결혼하면서 서재방을 꽉 채우는 책장을 들였고, 사무실 책상에도 사물함에도, 친정집 내 방에도 책이 가득했다.
'진짜 쓰레기'를 버리는 저 난이도 작업이 끝나면(정말 저난이도일 수밖에 없는 게, 쓰레기는 고르기도 처분하기도 너무나 쉽다. 골라서 쓰레기통에 버리면 끝 아닌가) 이제는 '예쁜 쓰레기'를 버려야 할 차례가 온다. 보통 예쁜 쓰레기라는 말은 보기에는 좋으나 사실 별 용도가 없는, 공간만 차지하는 인테리어용 소품 등을 일컫는 데 쓰인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책들이야말로 '예쁜 쓰레기'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과연 나에게만 책이 예쁜 쓰레기일까? 잘 생각해봤으면 한다. 책장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 중에 주기적으로 꺼내 읽는 책은 몇 권이나 있는지 혹시 한 번도 읽지 않은 책은 없는지, 분명 내 책장에 있는 책인데 처음 보는 듯한 책은 없는지 말이다.
몇 년간 읽히지 않은 채로 꽂혀 있는 책은 인테리어 소품과 다를 바가 없고, 그렇다면 그 책은 예쁜 쓰레기로 분류되기 적합한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게 된다. 이 시점에서 혹시 불쾌하실 수 있을 작가분들에게는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책이라는 존재 자체가 가치가 없다는 게 아니고, 적어도 비움의 과정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일본의 인기 미니멀리스트 미셸은 '물건을 순환시켜야 한다'라고 조언한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미니멀리스트들이 순환을 강조한다. 물처럼 물건도 고여 있으면 존재의 의미가 퇴색된다는 것이다. 쓸모없이 머물러 있느니 과감히 폐기해 공간을 만들거나, 판매 등으로 수익을 창출하거나, 이 물건이 필요한 사람에게 기쁜 마음으로 나눠주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물건의 가치를 높여준다는 논리다.
책을 정리하기로 (혹은 미니멀 전문용어(?)로 '순환시키기로') 결심하고 나서 책장을 둘러봤다. 책장을 가득 메운 책 중에 읽은 책이 반도 채 되지 않았다. 읽지 않은 책들의 상당수는 욕심 때문에 구입하거나 구한 책이었다. 업무에 필요해서 마련했다가 몇 챕터 읽지 않은 채 방치한 책도 있었다.
내가 남겨둘 책을 솎아내는 기준은 `휴가지에 들고 가고 싶은지`였다. 여가시간이 생기더라도 쉽게 꺼내 들지 않는 책은, 앞으로도 그렇게 될 확률이 높다는 판단에 과감하게 처리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솎아낸 책은 업무로 인해 구입한 서적들이었다. 부서가 바뀌고 나서는 볼 일도 없었고 마음에 들어서 구입한 책이 아니니 애정도 없었다.
일명 '야망 잡동사니' 부류에 속하는 책도 과감히 정리하기로 했다. 야망 잡동사니란, '일주일 안에 80% 버리는 기술'이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된 용어다. 저자 후데코는 '되고 싶은 자신이 되기 위해 구입한 것'들을 야망 잡동사니라고 명명했다. 이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이상적인 나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들인 것들을 칭한다.
내 야망 잡동사니 중 하나는 '경제·경영 서적'이다. 나는 경제신문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경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연과학을 전공했다. 그래서 그런지 경제·경영 관련 지식이 해박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읽겠다며 틈 날 때마다 관련 책을 모았다. 하지만 만 10년을 경제신문 기자로 근무하면서 완독 한 경제·경영 서적은 손에 꼽힌다. 시간이 나면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는다. 그러면서도 경제·경영 책을 버리지 못한 이유는, 후데코 말을 빌려 표현하면 '되고 싶은 자신이 되려고 구입했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는 것은 자신의 희망과 꿈을 버릴 결의를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이 책이 잡동사니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야망 잡동사니 얘기가 나온 김에 다른 길로 새서, '되고 싶은 나'를 상상하며 구입한 또 다른 물건이자 처분 예정인 물건을 공개해보겠다. 바로 'DIY 키트'다. 집에서 바느질을 하는 고상한 나를 꿈꾸며 구입했지만 3년째 봉투조차 뜯지 않고 있다. 단추가 떨어져도 바느질을 하기 싫어하는 내가 도대체 왜 헤어밴드 DIY 키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앞서 언급한 책에서 저자 후데코는 '언젠가 뜨개질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에 통신판매로 산 뜨개질바늘 세트를 품고 있다가 28년이 지난 후에 버렸다고 한다. 그녀의 경험과의 높은 싱크로율을 감안해 볼 때 내 DIY 키트도 가만히 뒀다가는 최소 25년은 더 '보관 중'인 상태로 방치될 확률이 크다. '고상한 나'를 아직도 포기하지 못해 여전히 들고 있지만, 이 원고가 공개될 무렵에는 분명 처분되어 있을 것이라고, 나와 독자에게 약속한다.
다시 책이라는 주제로 돌아와 보자. 책을 과감히 정리하다 보면 책을 모아두는 공간인 책장은 비게 마련이다. 책이 사라지면 책장을 꼭 책장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사라진다. '오늘도 비움'이라는 책을 쓴 신미경 작가는 책장에서 책을 덜어내고 생긴 빈 공간에 자신이 수집한 그릇들을 모아두었다. 모델하우스 서재에도 책장에 책을 빼곡히 꽂아둔 경우는 드물지 않은가.
'여백의 미'를 통해 우리의 서재를 모델하우스와 비견될 정도로 아름답게 가꿔보는 것은 어떨까. 책장을 비운다고 해서 책을 읽었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