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옷장에는 도저히 입을 옷이 없다. 그래서 옷을 샀는데, 옷을 걸 공간이 없다. 어쨌든 옷을 샀지만 또 입을 옷이 없다. 그래서 또다시 옷을 샀더니 이번엔 옷을 걸 공간도 옷걸이도 없다. 공포의 `옷장 미스터리`를 경험한 지 어언 십수 년, 그 기간에 쉬지 않고 옷을 샀지만 나는 여전히 옷이 없다. 하지만 옷장에 공간도 없다. 옷장을 늘리면 되지 않냐고? 부끄럽지만 우리 집은 작은 방 전체를 옷방으로 쓴다. 문을 여닫는 공간만 제외하고 3면이 시스템 옷장으로 꽉꽉 채워져 있다.
그런데도 옷이 없는 건 도대체 왜일까, 일본 작가 와타나베 폰의 만화 `그만두어 보겠습니다!`를 통해 이 미스터리에 대해 조금이나마 깨달음을 얻었다. 나같이 매일같이 이 미스터리에 시달리던 작가. 어느 날 작정하고 옷장을 찬찬히 살펴보니 `조금 개성 있고 코디는 대략 난감한 옷`이 쌓여 있었다고 했다. 아! 내 옷장도 비슷한데?
오래전 노래처럼, 많은 남성들의 이상형은 `청바지에 흰 티셔츠`가 잘 어울리는 여자라고 하더라. 남자들만 그런 게 아니다. 여성들 역시 청바지에 흰 티·혹은 셔츠 한 장만 걸쳐도 멋진 남성은 당연히 좋아한다.
그러나 나 자신이 청바지에 흰 티만 입어도 예쁜지는 도무지 잘 모르겠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만 입고 다니기엔 너무 밋밋하고 재미없지 않은가. 기본 아이템을 사러 백화점에 가도 왜인지 조금은 포인트가 있는 옷을 사고 싶어 진다. 때마침 유행하는 디자인도 한 벌씩 걸려 있고, 그런 옷도 한 번쯤 입고 싶어 손이 간다. 이들을 한참 보고 나서 원래 사려했던 기본 아이템 코너로 다시 돌아가면 `음, 왠지 집에 있는 것 같아` 결국 다른 옷만 집어오게 된다.
그래서 그 옷을 정작 집에서 입어보면 어떨까. 그 `약간의 포인트` 때문에 다른 옷과 매치가 어려워 도로 내려놓게 되고, 유행하던 옷은 유행이 지나면 손이 잘 안 간다. 이렇게 쇼핑이 실패하고 옷장은 미궁 속으로 빠진다.
옷을 찾아입으려면 대.략.난.감.(이 정도는 아니지만..^^;)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겠다고 다짐하면서 미궁 속에 빠진 내 옷장을 구출하기로 결심했다. 사실 옷장 정리는 미니멀 라이프의 가장 기본이다. `정리 철학`으로 시사주간지인 타임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까지 선정된 일본의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는 옷과 책, 서류, 추억의 물건 순으로 정리를 진행할 때 효율이 가장 좋다고 했다. 정리하기 가장 쉬운 분야부터 어려운 분야로 넘어가라는 뜻이니, 뒤집어 말하면 `옷 처분`이야말로 미니멀 라이프 도전의 가장 기초 파트인 셈이다. 그만큼 대부분의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보유하고 있는 물품이라는 뜻이다.
곤도 마리에는 옷장 정리를 할 때, 옷장과 서랍 속에 있는 모든 옷을 꺼내놓고 버릴 옷과 버리지 않을 옷을 구분하라고 했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 오로지 `옷만` 정리를 하라고 조언했다. 그래야 내가 어떤 옷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고 필요한 옷과 그렇지 않은 옷을 구분한 뒤 정리까지 완료할 수 있다는 게 그의 팁이다.
시간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방식을 추천한다. 하지만 일과 육아를 병행하고 있는 워킹맘 입장에서 정리가 완료될 때까지 `옷 무더기`를 쌓아두는 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하루에 1시간 이상을 정리에 시간을 낼 수 없고, 바쁜 출근시간 옷 무더기로 인해 남편과 나의 동선을 방해받아서도 안 됐다. 게다가 모든 것이 장난감인 두 살 아기에게 옷 무더기는 위험하다. 무엇보다 옷 먼지에 호흡기가 다칠까 걱정됐다.
곤 도마리에는 이렇게 옷을 먼저 꺼내놓고 정리하라고 조언한다. 나에겐 현실적으로 어려운 조언이다.
그래서 수정한 전략은 `우선 보이는 것(걸려 있는 옷)부터 비우기`였다. 2년 동안 입지 않은 옷(보통은 1년 동안 입지 않은 옷을 처분하는데, 나는 초보니까 관대한 조건을 달았다)을 처분하기로 했다. 목표는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 외에 쌓여 있는 `옷상자`를 없애는 것이다. 계절마다 옷을 바꿔 걸며 옷장을 정리해야 하는 일은 무척이나 귀찮지 않은가! 앞서 언급했듯, 내가 미니멀 라이프에 도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치우기 싫어서`다. 많은 미니멀 라이프와 관련 책들은 `옷장 미니멀에 성공하면 계절마다 옷장 정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를 유혹했고 나는 흔쾌히 이 유혹에 넘어갔다.
옷 박스들이여, 사라져라!
조건에 부합하지만 버리기가 몹시 아까운 옷들은 남편과 엄마의 조언을 구했다. 그들에게 `이건 좀 아니지`라는 답이 돌아오면 과감히 처분했다. 미니멀 라이프 연구회의 `아무것도 없는 방에 살고 싶다`는 책에서도 정리가 힘든 물건은 `제3자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을 추천한다. 혼자 정리하려고 하면 물건에 대한 추억이 떠올라 좀처럼 버릴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의 눈을 빌리는 것이다.
그래도 버리기가 아까울 때는 그 옷을 출근길에 입고 나갔다. 하루 종일 오랜만에 예쁜 옷을 입어 기분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면 그 옷은 통과다. 하지만 불편함이 느껴지거나, 뭔가 구닥다리의 느낌이 나거나, 왜인지 위축된다면 과감히 작별하기로 했다.
온라인 쇼핑으로 구입했지만 쇼핑몰에 올라온 모델 사진과 달라 도무지 손이 가지 않는 옷들은 2년이 지나지 않았더라도 처분했다. 이미 실망한 옷에 다시 손이 가는 일은 별로 없다는 것을 수많은 쇼핑 실패를 통해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나는 지금까지 총 200벌에 가까운 옷을 버렸다. 미니멀 라이프에 `도전`한 지 6개월, 어떤 옷을 버렸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버렸던 옷이 뒤늦게 아까웠던 적도 딱히 없다.
다만 놀라운 변화는 옷을 버리니 옷장에 있는 옷들이 조금 더 잘 보이게 됐다는 것이다. 그 덕에 옷을 덜 샀는데도 옷이 더 많아졌다. 입지 않는 옷들 사이에 끼어 있어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던 옷들을 발견한 덕분이다.
조금 더 옷장에 여유가 생기면 옷걸이도 바꿔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200장의 옷을 버렸지만 아직 나의 옷장 구출 작전은 갈 길이 멀다. 옷을 쇼핑하는 습관도 아직 끊지 못했다. 아기 옷은 손조차 대지 못했다. 그러나 네 박스였던 옷 박스가 한 박스로 줄었고, 이제는 옷걸이에 공간도 생겼다.
`마음을 다해 대충 하는 미니멀 라이프`의 저자 밀리카는 미니멀 라이프를 한다고 해서 갑자기 대단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비우는 삶 가운데 무엇을 남길지, 그리고 어렵게 얻은 여백을 무엇으로 채워나갈 것인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고 했다.
나 역시 새로운 옷에 대한 욕망보다는, 어렵게 얻은 `공간`을 지켜나가고 싶은 생각이 커져가고 있다. 그리고 남긴 것에 대한 소중함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그래서 이 도전을 아직은 멈출 수가 없다. 옷장을 완전히 구출해 내고, 더 큰 자유를 얻어봐야겠다. 그리고 그 경험 역시 다시 공유해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