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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봄 Aug 16. 2019

사소해서 못 버리는 물건들의 이야기

지극히 사소한 물건은 정말 사소한 것들이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쓸모없는 물건도 버릴 수 없는 집착`에서 하루키는 레코드니 책이니 테이프니 팸플릿, 서류, 사진, 시계 우산, 볼펜 같은 `무용지물`의 자연적인 증가에 대해 유쾌하게 투덜댄다.


특히 그가 말하는 무용지물의 대표적인 예는 `볼펜`으로 하루키의 집에는 50개가량 볼펜이 있다고 한다. "어째서 볼펜이 50개씩이나 있는가?"하고 물어도 갑자기 대답할 수가 없다고. 일부러 문방구에서 볼펜을 돈 주고 산 기억은 거의 없는데도 볼펜은 끊임없이 계속 늘어난다. 아마도 기념품으로 받거나, 누군가 잊어버리고 갔거나, 여행 갔다가 호텔에서 기념으로 가지고 돌아오거나 등등 `볼펜이 침입한 이유`를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렇게 50개 볼펜은 하루키의 집에 `밤에 내리는 눈처럼` 조용히 쌓여갔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그 볼펜 다발이 보이면 짜증이 나지만 또 버릴 수도 없다는 게 그의 고민이다. 아직 잉크가 많이 남아서 사용할 수 있는 볼펜을 쓰레기통에 내버린다는 건 광천수로 이빨을 닦는 것과 같은 정도의 용기가 필요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따금 `잉크가 굳어져서 쓸 수 없는 게 있지 않을까?`하고 기대를 하며 시험해 보지만 그런 경우가 거의 없어 실망할 뿐이다. 이 에세이가 담겨 있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책의 제목처럼 그의 고민은 참으로 소소해 보이고 한편으로는 행복해 보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들로 버릴 수 없는 또 다른 물건들, 가령 레코드와 책들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그는 그야말로 이사할 때마다 `죽을 지경`이라고 고백했다.


분명 무용지물인 것을 알면서도 차마 이러한 저러한 이유로 버리지 못하는 하루키의 이야기가 눈에 쏙쏙 들어오는 이유는 그의 고민이 남일 같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덤벙거리는 나 역시 자가 증식하는 수많은 무용지물을 집에 쌓아두고 있다. 내 경우에는 유독 쇼핑백이나 박스가 그렇다.


선물을 받았거나 물건을 구입할 때 받은 쇼핑백은 왜 이렇게 버려지지가 않는지. 모양도 예쁘고 고급 브랜드 쇼핑백은 왜인지 쓸 곳이 있을 것만 같다.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없으면 아쉬울 듯해서 재활용함에 넣지 못하고 쌓아둔 쇼핑백이 상당하다. 어느 정도 상당하냐고 물으신다면 나름 잘 보이지 않게 문 뒤에 보관한다고 쌓아뒀더니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옷방 구석에 쌓아뒀더니 이제는 붙박이장 문이 열리지 않는다. 나 이상으로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엄마마저도 집에 오면 `쇼핑백 좀 다 갖다 버려라`라고 한마디 할 정도다.


박스 역시 특히 선물이 담겨 있던 상자는 모양도 예쁘고 왜인지 어디에 활용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쌓아 둔다. 책상 선반 한 칸을 이런 박스로 채웠는데, 자리가 부족해 책장 맨 위칸에 올려두다 보니 본의 아니게 책장 중 두 칸은 `빈 상자`들을 위한 공간이 되었다.(나와 함께 열심히 매일같이 물건을 버려주고 있는 남편은 이 상자들 안에 무언가가 들어 있는 줄로만 알고 있다.) 반년 넘게 물건을 하루에 몇 개씩 버리고 있는데도 `살아남은` 동지 들치고는, 너무 소소하지 않은가. 나는 심지어 이들을 이사를 하면서도 모두 들고 왔다. 그런 점에서 나와 하루키는 공통점이 매우 많다고 할 수 있다.(하하)


거기에 앞서 언급한, `물건 못 버리기`의 달인 엄마가 가끔 우리 집에 오면 생기는 새로운 물건이 있는데, 바로 `빵끈`이다. 빵끈이라는 용어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제과점에서 비닐을 묶어주는 철사가 들어 있는 그 끈이 엄마의 방문 이후에는 식기 건조대에 두세 개 묶여 있다. 하루키의 표현처럼 "아무리 쌓아보았자 그렇게 무겁지도 않고 장소도 크게 차지하지 않으니까" 그대로 둔다. 그리고는 나 역시 제과점에서 식빵을 사 와 맛있게 먹은 후에 그 빵끈을 엄마가 걸어둔 빵끈 옆에 묶어둔다. 이 일이 반복되면 식기 건조대 기둥 하나를 수많은 빵끈이 장식하게 된다.


생각해 보니 선물과 함께 딸려온 리본도 나의 서랍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물건이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포장해줄 때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선물이나 케이크 포장에 딸려온 리본을 하나둘 모으다 보니 달팽이 같은(동글동글 말아서 넣으므로) 리본 끈이 서랍 한 칸을 가득 메웠다.


미니멀리스트를 꿈꾸는 이들에게 유명한 네이버 카페 `미니멀 라이프` 주인장인 황윤정 씨는 `내가 보는 관점에서 버리기 아깝고 죄책감이 드는 물건일지라도 타인의 시선으로 보면 그저 쓰레기인 경우가 많다`고 했다. 하루키의 볼펜, 나의 쇼핑백과 박스, 빵끈, 리본 모두 마찬가지 아닐까. 심지어 이 물건들은 내 돈을 주고 산 게 하나도 없다. 나는 빵을 샀지 빵끈을 산 적이 없다. 화장품을 샀고 쇼핑백은 그저 화장품이 담긴 채 나에게 딸려왔을 뿐이다.


앞서 소개한 적이 있던 일본 드라마 `우리 집엔 아무것도 없어`에서 `버리기 마녀`인 미니멀리스트 주인공은 함께 사는 할머니가 잘 씻은 채 싱크대에 둔 푸딩 용기를 버린다. 푸딩용 전용 사기그릇이 아닌, 푸딩을 먹고 나서 생긴 플라스틱 용기에 불과하지만 할머니는 `새에게 물을 줄 때 쓰려고 했었다`며 주인공에게 크게 화를 낸다. "도대체 너에게는 아깝다는 마음은 없는 거냐"며 분을 삭이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주인공 마이는 "쓰지 않는 물건을 놔두는 게 더 아깝지 않냐"라고 반문한다.


책 `미니멀리스트`의 저자 조슈아 필즈 밀번과 라이언 니커디머스는 미니멀 라이프를 위해 `20/20 이론`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들은 `당장 필요 없는 물건을 없애고 나더라도 그 물건은 최대 20달러를 들여 최대 20분 안에 대체할 물건을 구할 수 있다`는 이 이론을 벗어난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밝혔다. 심지어 다시 구하러 가는 경우는 1년간 두 사람의 경험을 모두 합쳐 다섯 번이 채 되지 않았고, 그 물건을 구하느라 20달러를 넘게 쓰거나 20분을 넘게 이동할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나 역시 이 이론을 받아들여 당장 쇼핑백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내가 버리지 않는 그 물건들은 20달러는커녕 1달러, 1000원이면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니 그들의 가설을 벗어날 일은 있을 리가 없다. 도대체 나는 1000원도 안 하는 물건에 왜 이리 집착했단 말인가!


쇼핑백을 버리겠다고 남편에게 선언하자, 남편이 좋아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오, 웬일이야? 쇼핑백은 네 보물이잖아."


하, 이 말이 왜 이리 기분이 나쁠까. 내 보물이 고작 공짜로 받은 쇼핑백이라니. 이제 공짜 보물(이라고 쓰고 무용지물, 쓰레기, 잡동사니라고 읽는다)은 홀가분하게 내려놓고 정말 보물을 보물로 여기면서 살아야겠다. 까짓것, 종종 광천수로 양치하면서 살아보는 것도 즐거울 것 같다. `쓸모없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집착`보다는 이런 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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