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인터뷰를 통해 친분이 생긴 일러스트레이터 작가 밥장님에게 새로운 단어 하나를 배운 적이 있다. 바로 `일점호화주의(一點豪華主義)`다. 일점호화주의는 1960~1970년대에 활동하던 일본의 전위예술가 데라야마 슈지가 만들어 낸 말로, 정말 좋아하는 한 `점`에 대해서는 마음껏 사치하라는 뜻이다.
밥장 작가는 `일점호화주의`, 조금 쉽게 표현하면 자신의 `호화 취향`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일례로 데라야마 감독은 같은 책에서 "잠이야 담요 한 장으로 다리 밑에서 자도 상관없으니 일단은 원하는 스포츠카부터 사고 보자. 그런 일점호화주의를 지향하지 않는 한 우리 시대에는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다"고 말했다. 가장 원하는 물건에 충분히 `사치`를 하면 역설적으로 `욕망`을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혜민스님도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비슷한 취지의 글을 올렸다. "집이나 피아노같이, 한번 사면 두고 두고 써야 되는 것들은 내 분수에 맞는다고 판단되는 `약간 좋은 것`보다 이왕이면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세요. 약간 좋은 것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겠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꼭 후회하게 됩니다."
돈을 펑펑 쓰지 못하는 성격인 나는 30년 넘게 일점호화주의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미니멀라이프에 도전하면서 나는 조금씩 나의 호화 취향을 알아가고 있다. 몇 달 동안 있는 물건을 버려가면서 고생해놓고는 웬 호화 취향이며 일점호화주의란 말인가! 줄이고 비워서 홀가분해지기도 모자란 와중에 사치를 논하다니 하는 핀잔을 들을 법도 하다.
그러나 꽤 많은 미니멀리스트들이 `좋은 물건을 사는 것`이 미니멀리즘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을, 미니멀라이프에 도전하기 전엔 나 역시 몰랐다. 일본의 유명 미니멀리스트 `아키`는 이십대에 에르메스 지갑을 사고나서 오히려 물건을 줄이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좋은 물건을 사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이전에는 새 지갑을 사고도 금세 다음번에는 어떤 걸 살지 고민했지만, 줄곧 갖고 싶었던 지갑을 손에 넣으니 이제 지갑은 이거 하나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정말로 갖고 싶은 물건을 사지 않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을 마구 사 버릇한다면 절대 물욕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심플하게 산다`의 저자 도미니크 로로는 고급 물건은 부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선입관을 버려야 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최상급 캐시미어로 만든 담요 한 장은 보통 담요 두 장보다 더 따뜻하다. 즉, 고급 담요 한 장을 사면 `그저 그런 담요` 여러 장을 소비할 확률이 줄어드는 셈이다. 또한 마음에 꼭 드는 물건은 크나큰 위안과 안도감, 평화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어설픈 물건은 망설이 없이 치우고 완벽한 물건으로 대체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시시한 물건이나 한물간 물건이 우리의 세계를 잠식하게 내버려두지 말자"는 로로의 말은 나에게 큰 자극이 됐다.
이후 나는 물건을 구입할 때 정말 갖고 싶었던 품목에 한해서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건이 아닌 `바로 그 물건`을 사려고 노력하게 됐다. 사실 어떻게 보면 사치인데, 결과적으로는 가장 합리적인 소비라는 점을 구입할 때마다 깨닫는 중이다. 일례로 얼마 전 드라이기를 교체하면서 큰맘 먹고 40만원대 제품을 구입했다. 보통 드라이기의 10배가 넘는 금액이지만 매일 사용하고 있고, 매일 사용하는 물건인 만큼 마음에 꼭 드는 제품을 쓰고 싶었다. 기존에 선물을 받아 사용했던 드라이기가 사용하기 크게 불편하지 않았음에도 `너무 무겁고, 머리를 말리는 데 오래 걸린다`며 사용할 때마다 불평을 일삼았는데, 원하는 물건을 사고 나니 이러한 불만이 쏙 들어갔다.
옷장을 정리하며 많은 옷을 비우고 난 후에는 1년 이상 눈독들였던 고급 코트를 하나 샀다. 한 달 생활비에 육박하는 거액을 투자했지만 입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애착이 가지 않는 옷을 여러 벌 돌려 입는 것보다 이 코트 한 벌을 매일같이 입는 것이 훨씬 삶의 질을 높여준다. 일본의 스타일리스트 지비키 이쿠코의 저서 `옷을 사려면 우선 버려라`에는 "무심코 그저 그런 옷을 입는 것 자체가 멋진 옷을 입을 회수를 줄이는 원인"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후줄근한 옷을 입은 날,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꼭 만나는 비극이 발생하는 일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겨울 코트 한 벌을 장만할 때는 100일 중 80일은 입을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게 이쿠코의 생각이다.
실속 있는 소비를 할 때 우리는 주로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따진다. 값비싼 제품을 사더라도 그 제품을 만족하며 사용하는 빈도수가 높다면 몇 번 쓰고 결국 버리는 저렴한 제품보다 되레 가성비가 좋을 수 있다. 정리컨설턴트 윤선현 씨는 저서 `부자가 되는 정리의 힘`에서 좋은 물건은 볼 때 마다 즐겁고 평생 만족스럽게 쓸 수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생각했을 때 돈을 모으는 길이라고 언급했다.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적게 사기 때문에` 좋은 물건을 살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는 효과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꼭 필요한 물건을 산다는 건 불필요한 물건을 사지 않는 것이고 이를 통해 절약한 돈으로 꼭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산다면 이 만큼 완벽한 소비가 있을까?
좋은 물건을 사용하면 스스로 좋은 물건인 것처럼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고 한다. 어중간한 물건을 비우고, 좋아하는 물건으로 하나씩 나의 공간을 채워가며 `호화롭게` 사는 길을 선택해 보려 한다. 일점호화주의라는 말을 만들어낸 데라야마의 표현처럼, 한번 사는 인생을 이러한 행위를 통해 `감동이 있는 삶`으로 만들어보는 것은 꽤나 가치 있는 일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