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일기_퇴사자 엄마를 위한 위로

by 봄책장봄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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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일기 14화_퇴사자 엄마를 위한 위로(2018.12. 작성)



때는 바야흐로 12월 대림 시절. (천주교에서 대림 시절은 성탄이 오기 전 4주를 가리킨다. 이 시절 성당에서는 고백성사라는 것을 하는데, 천주교 신자들은 1년에 2번 의무적으로 고백성사를 해야 한다. 이 성사의 이름을 특별히 ‘판공성사’라 부른다.)



우리 집에도 판공성사를 보라는 성사 표가 도착한다. 그런데 퇴사를 앞두고 있던 어느 날, 퇴사자의 어머니가 갑자기 이런 말을 툭 내뱉는다.


고백성사를 못 하겠어, 욕 나올까 봐.

남 탓을 잘 안 하시는 우리 어머니가 대뜸 판공성사 표를 들고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고백성사 안 할래. 못 하겠어.”

“아니, 왜요?”

“고백성사하다가 네 동료 욕할까 봐.”



욕할 줄도 모르는 우리 엄마를 욱하게 만든 건 내 동료일까, 아니면 고작 동료애 파탄으로 직장까지 접으려는 나일까. 내 퇴사가 나에게만 큰일인 줄 알았는데 우리 엄마에게는 더 충격적인 사건이었나 보다. 게다가 퇴사의 파장은 나보다도 우리 엄마에게 더 길고 짙은 파동을 일으키는 듯하다.


“남의 가슴 아프게 한 사람은 결국 잘 될 수가 없어.”

이런 주문을 혼자 되뇌시는 건 나를 위로하는 말씀이실까, 엄마 자신을 위로하는 혼잣말이실까. 그런데 딱히 ‘권선징악’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나도 완전한 '선'은 아니요, 상대도 명백히 '악'은 아니다. 아니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인간관계에 업무가 얽히고설키면서 관계의 실타래가 배배 꼬였다. 나는 그저 그 실마리를 찾지 못했거나, 찾기 싫어 ‘쓱쓱 싹싹 쓱싹쓱싹’ 칼질을 하여 내 사회생활 일부를 도려낸 것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칼질로 살이 베어 피가 나는 쪽은 상대가 아니라 외려 나였고, 이때 나보다 더한 출혈로 아파하는 분은 다름 아닌 우리 엄마였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내가 퇴사를 결정한 후, 종종 나에게 ‘남 아프게 해 놓고 잘 된 사람 못 봤다.’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조금 심약하여, 혹은 착한 척하느라 저주의 말을 내뱉지 않자, 내 주변에서는 나의 마음을 대신하여 욕을 퍼부어 주곤 했다. 그런데 이러다 우리 엄마까지 이 ‘욕설 대열’에 동참시키게 생겼다.


나, 착한 우리 엄마를 대체 어디까지 내몰고 있는 걸까.

고백성사는 내가 해야 한다.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제 큰 탓이로소이다. 이 직장에서 더 버티지 못한 제 큰 탓이로소이다.


“직장 관두고 나온 사람만 손해잖아.”

“손해인가…….”

“그럼, 밥줄이 끊긴 건데!”


이렇게 나는 경제적 불효를 예약 중이고 걱정 한 꾸러미를 우리 엄마에게 이미 ‘배송 완료’한 상태다. 머잖아 반백 년의 나이가 될, 다 늙은 딸내미를 위해 우리 엄마는 새벽 6시도 되지 않아 새벽밥을 차려 주신다. 나는 나의 퇴사로 엄마에게 늦잠을 선물해 드리게 생겼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딸내미 걱정이 불어난 우리 엄마는 늦잠은커녕 선잠도 못 주무신다. 어쩌면 위로가 필요한 쪽은 내가 아니라 나의 어머니일지 모른다.



왜 네가 관둬야 하는데. 그만두는 사람만 억울한 거지.

이런 이야기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그리고 엄마에게서도 듣는다. 더 버티라고, 왜 네가 손해를 보느냐고, 상처 입은 것은 너인데 억울하지도 않으냐고, 상대가 바라는 대로 관둬 버릴 거냐고. 그럴 때면 사람들의 말대로 ‘나 이제, 억울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우리 어머니도 ‘그만두는 사람=억울한 사람’이라는 공식을 내게 적용하고 있으시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그만 나도 모르게 나는 이런 말이 나오려 한다.



그, 그런데……. 엄마, 미, 미얀. 나, 사실 한 개도 안 억울해.


억울하지 않다는 소리가 이상하게 들릴 법도 하지만 그렇게까지 억울할 건 또 무어냐는 게 내 생각이다. 내가 알게 모르게 해 왔던 말과 행동들이 이 사태로 나를 끌어들였을 것이고, 그 폭풍의 소용돌이에서 나는 지금 살짝 발을 빼기로 한 것뿐이다. 이 소용돌이에서 오래고 살아남는 것만이 ‘지상 최대의 인생 과제’라고 믿고 견디는 일이야말로 더 억울한 삶이 아닐까? 나는 ‘몸 힘들고 마음 다치며 끝까지 버티는 억울한 삶’보다 ‘몸 편하고 마음 홀가분하게 중도 포기를 선언하며, 덜 억울한 삶’을 선택하기로 했다.



다만 이 퇴사자, 엄마께 죄송하다. 엄마는 내 퇴사가 억울한데 나는 억울하지도 않고 이젠 되레 마음이 편하다.



엄마, 지금 나만 행복해서 미안해요.

힘들었던 마음을 가족들에게도 꽁꽁 숨긴 채 홀로 버티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감정의 옆구리가 버티다 버티다 결국 터져 버렸다.


“엄마, 나 너무 힘들어. 때려치우고 싶어.”

“왜, 무슨 일이야?”

“이러쿵저러쿵 저러쿵이러쿵…….”

“사표 내 버려.”


그 터진 감정을 엄마께 쏟아내며 나는 한결 가벼워졌다. 나의 감정을 조심스럽게 꿰매 주시던 나의 어머니.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보다는 엄마 쪽이 훨씬 더 큰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셨던 것 같다. 그런 엄마를 생각하니 내 마음 편하자고 가족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죄스럽다.


그래서 내 마음은 요새 일부러 더 엄마께 자주 찾아간다. 괜히 엄마 옆에 더 오래 앉아 있고, 잠든 엄마 곁에서 발을 주물러 드리며 ‘엄마’라는 자리, 그 옆에 괜히 누워도 본다. (그러다 잠을 잘 못 드시는 엄마를 깨워 버려 고만 혼이 날 때도 더러 있다.)



퇴사 이후의 삶은 안갯속일 것이다. ‘내일의 할 일’을 질서 정연하게 정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고, 한 달마다 자동으로 내 노동이 보상을 받던 정기적인 삶에서도 저만치 멀어질 것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나의 어머니는 다 늙은 딸내미를 더욱더 걱정으로, 또 한숨으로만 바라보시는 건가 보다.



그러나 엄마, 어머니. 나 꼭 잘 될게요.


이 말을 엄마께 전해 드리려고 한다. 사실 이 말은 엄마께 드리는 약속이자 나한테 들려주고 싶은 다짐이다. 불투명한 안갯속에서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모습을 나의 어머니께 꼭 보여 드리고 싶다. 퇴사자의 어머니도 함박웃음과 박장대소가 가능하다는 것을 이 예비 퇴사자가 꼭 알려 드리고 싶다.



엄마, 걱정 마요.

퇴사자는 자신을 위로하기 전에 자신의 가족부터 위로해야만 한다. 그게 ‘퇴사 가족’에 대한 첫 번째 예의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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