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고 보면 나는 지금 알몸으로 직장을 나선다. 처음부터 단단한 능력이나 예리한 기술을 지니고 직장이라는 곳에 발을 디딘 게 아니었다. 무장하고 당당히 직장에 나서는 다른 이들과 달리 나는 얼결에 대강 있는 옷(능력)만 주워 입고 이곳에 발을 디뎠다.
그러다 갑자기 세찬 비바람이 나를 내리쳤다. 걸친 게 거의 없는 맨몸의 상태였으므로 타인의 판단이나 언행은 가감 없이 내 가슴팍에, 내 몸 구석구석에 내리꽂혔다. 생채기를 내고 깊은 상흔을 남기기 아주 쉬운 속살이었다. ‘퇴사’라는 다리를 건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누덕누덕 추레한 옷을 걸치고 자꾸만 발가벗겨지려는 내 안의 나를 보고야 만다.
나, 얼마나 발가벗겨지고 있는 것일까?
직장 내 갈등을 겪으며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나의 단점은 대체 무엇일까? 무엇이기에 상대를 질리게 만든 것일까?
첫째, 느리다. 그렇게 느린가 싶지만, 과연 느리다. 그렇게 급할 필요가 있나 싶은 일 앞에선 더욱더 느리다. 내 동료가 지적했던 점도 이것이다. 무턱대고 느린 일 처리. 사실 나는 매일 아침 급행열차를 타고 출근을 했다. 그리고 매우 이른 시간에 직장에 도착했다. 그렇게 급히 직장에 와 놓고 정작 ‘일’이라는 친구만 만나면 ‘어이, 좀 쉬었다 가세.’하며 ‘일’을 내 곁에 붙들어 놓고 떠나보낼 줄을 몰랐다.
둘째, 자존심이 없다. 처음 계약할 당시 경력 많은 동료를 사수로 여기고 잘 따라 달라는 용역 책임자의 당부가 있었다. 난 원래 내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곧잘 굽힌다. 그 당부쯤은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했다. 허허.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존심 없이 의견을 따랐더니 왜 주도적으로 일을 안 하냐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난 소극적이다. 할 말이 있어도 쉬이 나서지 않았고 내 의견대로 해도 될까, 걱정만 하다 상대가 하자는 대로 흘러들었다. 때로는 내 의견 위에 ‘답정너(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가 살포시 얹히기도 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자존심 없이 굴면 사람들은 그를 심히 만만히 여긴다. “no 자존심 = 날 만만히 여겨 줘.” 이렇게 생각해 버리는 세상의 해석이 때론 슬프다. 하지만 이것도 세상의 엄중하고 엄연한 현실이니 받아들여야겠지.
셋째, 상처를 잘 입는다. 어디 입을 옷이 없어 늘 이렇게 ‘상처’라는 옷만 입는지, 원. 친구도 내게 '네가 나약한 건 사실이잖아.'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는 속이 쓰리다. 아마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인가 보다. 그래, 이젠 끝나는 마당이니 인정하자. 난 상처투성이 인간이다. 한 대 맞아도 열 대 맞은 듯 아파한다. 약한데 강한 척 말자. 약하니 약한 척하며 그냥 살자. 하지만 앞으로도 나, 상처를 갚긴 싫다. 입는 게 낫지 남에게 '상처'라는 옷을 입히는 건, 그래도 몹쓸 짓이다. 지금 당해 봐서, 나 그 심정, 꽤 잘 안다.
그리고 넷째, 나는 ‘인간관계 젬병’이다. 아이들에게 다정하게 구는 것은 꽤 즐기면서 어른들 세계에서는 사춘기 수줍은 소녀처럼 뒤꽁무니를 빼고 늘 숨을 준비를 한다. 중년의 나이에 여태 사람 사귈 줄을 몰라 어쩌나 싶다. 아이들 말로 치면 나는 절대 ‘인싸(인사이더)’는 될 수 없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초지일관 사회성 제로에, 인간관계 낙제점이다. 어쩌면 지금의 이 갈등도 내 인간관계가 폐쇄적이어서 갈등이 더 심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말로 풀고 마음으로 풀어야 ‘관계’가 더 단단해지는 법인데, ‘비 온 뒤 굳은 땅’과 같은 관계를 만드는 작업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나를 무시하는데 굳이 내가 나서서 이 인간관계를 뒤집어야 할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관계를 뒤집는 방법 따위도 잘 몰랐다.
퇴사를 앞두고 내 단점들을 복기하니, 이제야 자명하게 보인다. 일로든, 인간으로든 내게도 부족한 점이 분명 있었음을, 그리고 그 부족분을 겉 포장으로 덮어 오다 결국 여린 속살을 다 내보여야 했음을, 나는 뒤늦게 깨닫는다.
그러고 보니, 퇴사가 내게 준 건 ‘동료와의 끝’뿐이 아니었다. 퇴사는 내게 ‘나’를 주었다. 그중에서도 여실히 나의 단점, 나의 약점을 만천하에 드러나게 해 주었다.
자, 이제 나는 완전히 알몸이다. 다시 말해 지금부터는 쭉정이 없이 '나'라는 알맹이만 남은 셈이라는 뜻이다. 이는 ‘나’를 샅샅이 찾아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의 못난 구석구석을 처절히 탐험했으니, 나 이제, 더는 도망치지 않으리라.
뛰어 봤자 ‘나’라는 손바닥 위다. 내가 나를 보고 있다.
‘퇴사’라는 도망질 후에는 내 인생, 더는 숨지 말자.
(하지만 도망칠 때는 도망쳐야지, 뭐, 어쩌겠누. 그래도 열심히 달리다 보면 달리기 실력 하나는 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