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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Jan 05. 2021

안녕, 그리고 안녕하다

이사일지 20일 차

이사일지 19일 차_돈 준다는데 심통이 나다 (brunch.co.kr)





이사일지 20일 차_안녕, 그리고 안녕하다



마지막 인사를 잘할 수나 있을까.      



“인사 못 할 걸요. 지금 짐 다 뺐어요.”     


벽지도 지금 다 뜯겼단다. 집에 올라가 본 제부(씨)의 말이다. 이 말뜻은, 오늘 아침 내가 보았던 601호, 너의 모습이 이제 더는 아니란 소리다. 한 번만 더 너를 보고 싶었는데 한 번 더 보나 두 번 더 보나 아니면 영영 못 보나 영(0) 번만 보나 이별은 이별이다. 나는 그냥 돌아선다. 가다가 뒤돌아본다고 이별이라는 이사가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너에겐 못 했어도 사람들한테는 마지막 인사를 했다. 17년을 살면서 서로의 집에 왕래할 정도의 이웃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 가족이 좀 그렇다. 선 딱 긋고 산다. 예의만 차린다. 냉정한 데가 있다. 아니면, 그냥 요새 추세대로 개인주의로 사는 건가.      


생각해 보니 17년 전 너에게 이사 왔을 땐 나도 인사를 제법 잘했다. 경비 아저씨께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처음 본 이웃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그런데 그리 인사를 열심히 했더니 사람들, 당황하더라. 한 달이 지나고서부터 나도 인사를 걸렀다. 지금은 엘리베이터를 타도 구석만 쳐다보기 바쁘다. 낯이 익으나 목소리를 들어 본 적 없는 이웃들의 얼굴을 모르는 척하는 일이 이젠 일상이 됐다.     



그런 우리에게도 마지막으로 인사할 이웃은 있었다. 

“누구누구한테 인사를 해야 할까?”     


놀이터를 다니던 탓에 쌍둥이 할아버지로 그 나름 유명한 우리 아버지가 인사 목록을 제안한다. 상추를 주시던, 그리고 최근에 같은 성당에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5층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자는 의견, 그리고 성당을 다니며 자주 인사를 나눴고 새해가 되면 덕담과 웃음을 주고받았던 인자하신 21층 부부 내외, 구역장이자 성물반 단장 일을 하시며 성당 일로 크게 수고해 주셨고, 나와도 친분이 있던 10층 1호 아주머니이자 단장님. 



우리는 아버지 책을 다섯 권 정도 주문했다. 이웃들에게 주기 위해서다. (아버지는 ‘간 보는 남자’다. ‘간 보는 남자’라는 책을 써서 그렇기도 하고, 엄마가 김치를 담그실 때마다 간을 보시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편집한 책에 내 명함도 살짝 끼워 두었다. 이웃이면서 이름을 서로 모르고 17년을 살았거나, 이름은 알았어도 서로가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지 묻지 않고 살아온 이웃들이었다. 그래도 늘 따듯했던 분들이기에, 또 10년 넘게 얼굴을 본 사람들이기에 알게 모르게 정이 많이 들었다. 우리는 마지막 인사만큼은 정중히 건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아버지 이름이 담긴 책을, 그리고 우리의 온 삶이 담긴 책을 드리기로 하였다.


“근데 9층이나 10층 2호 아주머니는 어쩌지?”


일부러 찾아가서 이사 간다고 선포하기에도 좀 멋쩍고, 인사를 아예 안 하기에는 그간 눈 맞추며 인사 나눈 햇수가 제법 되고.

 

“만나면 인사드리지, 뭐.”

“그럴까?”     


청첩장을 주어야 옳은 걸까 고민하는 예비 신혼부부들처럼 이사를 앞둔 ‘예비 이사꾼’들은 고민이 깊어졌다. 오버하며 책과 빵을 건네기도 우습고 그렇다고 인사를 안 드리기도 죄송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다가온 너와의 이별 당일. 헤어지는 날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갑작스럽게 떠나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에게 ‘우리 이별한답니다’라고 예의를 갖춰 너와 나의 이별 소식을 알릴 수 있다.      



“이사 가요? 오매.”     


갑자기 이사를 가느냐고 10층 2호 앵두 아주머니가 묻는다. (우리가 1층 화단을 지나갈 때 앵두나무에서 앵두를 따고 있던 10층 2호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빨갛게 잘 익은 앵두를 주신 적이 있다. 그래서 그 후로 우리는 그 아주머니를 우리끼리 ‘앵두 아주머니’라 부른다.) 평소 고구마순이나 시금치 등을 우리 집에 가져다주시던 분이었다. 우리가 감사의 의미로 빵을 사다 드렸더니 그 후로는 문 앞에 채소를 몰래 두고 가시곤 했다.      



“네. 그렇게 됐어요.”

“어디로 가?”

“저기 숲 속으로요.”

“숲속마을로?”

“아, 네. 그런 셈이에요. 흐흐.”



옆에서 듣고 계시던 아버지가 구체적 지명을 말씀드린다. 

"oo으로 이사 갑니다."

“아, 거기요?”

“근데 쌍둥이 조카들은 어떡하고?”

“제가 동생 보러 이 동네로 자주 와야죠.”

“그래야겠네.”     


아주머니와의 인연을 하나 더 보태자면, 그 10층 2호 아주머니는 우리 엄마에게 1초간 설렘(?)을 안긴 분이시기도 하다.


“손자 눈이 참 예쁘네. 아, 이제 보니 할머니 눈 닮았구먼?”


이 말씀을 전하던 그 할머니이자 내게는 엄마인 우리 최 여사께서 킥킥거리던 그 웃음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내 눈이 예뻤나 봐? 어릴 적 별명이 '왕눈이'었던 우리 엄마였다.       



그렇게 10층 2호 아주머니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나서 놀이터에 앉아 6층을 올려다본다. 너에게서 우리의 짐짝이, 우리의 세월이 뭉텅뭉텅 사다리차를 타고 빠져나간다. 멍하니 구경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우리 앞에 나타난다.     


“어이쿠, 이사 가요?”

“아, 네. 저희 이사 가요.”

“아니 나는 누가 이사를 가나, 하고 층수를 세어 보다가 6층인 거야. 그래서 지나가다가 5층 아저씨 만나서 6층 이사 가나 봐요,라고 하니까 5층 아저씨가 놀이터에 601호 사람들 있다고 인사하려면 가서 인사하라고 그래서 여기 왔지.”

“어이쿠, 고맙습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인사를 전하러 일부러 놀이터까지 와 주신 분은 9층 아주머니. 평소 밭 복장(밭에 가는 복장)으로 하고 다녔더니 가끔 예쁘게 꾸미고 선글라스 낄 때는 사람들이 자기를 못 알아보더라,라고 웃으며 말씀하시던 아주머니. 안녕히 계세요, 아주머니. 고맙습니다.     



뭐가 감사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지만 모든 이웃에게 ‘정말 그동안 감사했다'고 말씀을 전했다. 사실이 그랬다. 다 감사했다. 이웃으로 계셔 주시면서 눈 한 번 마주쳤던 모든 순간이 감사하다. 날씨가 더우면 덥다고 이야기 나누고 날씨가 궂으면 요새 날씨가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이야기를 나눴다. 쌍둥이 조카는 요새 할머니 댁에 안 오냐고 물으면 쌍둥이 근황도 전하면서 엘리베이터가 주는 침묵의 공기를 활기의 공기로 바꿔 나가곤 했다.

(아, 하나 더 감사한 일. 10층 성물반 단장님이 도넛과 과자를 이별 선물로 보내 주신 것도 감사하고, 21층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아침 일찍부터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이사 선물로 잔뜩 사다 주신 것도 감사했다.)     



그들은 그 자리에 있었고 앞으로 우리가 601호를 떠나도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아니 떠나는 이도 있을 테고 남는 이도 있을 것이다. 601호가 있던 그곳에서는 첫인사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순간들이 종종 태어나리라.  안녕하세요, 안녕히 계셔요, 는 무수히 되풀이되겠지.



“안녕하세요. ㄱㅂ 부동산이에요. 매수인 왔어요. 지금 오세요.”

     

한창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601호, 네 안에서 우리의 모든 것이 쏟아져 나오는 사다리차를 쳐다보고 있는데 우리에게 전화가 온다. 기다렸던 전화고 기다려야만 했던 전화다. 빗방울이 그친 습한 공기를 가르면서 우리는 긴장된 마음으로 부동산으로 향한다.  


그들이 잔금을 치르면, 우리가 잔금을 받으면 이제는 정말 너와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한다.      

지금껏 네 안에서 탈 없이 살아왔듯 마지막으로 또 한 번 마지막 인사를 청한다.

무사히 너와 이별할 수 있도록…….


끝까지 잘 부탁한다, 601호.     




(표지 출처: unsplash, @Amine Rock Hoov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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