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책장봄먼지 Jan 03. 2021

돈 준다는데 심통이 나다

이사일지 19일 차

이사일지 18일 차_꼼꼼히 너를 버리다 (brunch.co.kr)





이사일지 19일 차_돈 준다는데 심통이 나다




너는 아직 우리 곁에 남아 계속 덜컹거린다. 덜컹거리다 못해 아주 그냥 쉐이킷 쉐이킷 나를 흔들어댄다. 이성 회로가 고장이 났는지 나는 너를 보러 온 사람들, 너를 정성 들여 관찰하려는 사람들에게 그만 이성 회로 대신 감성 회로를 발동하고 만다.


"햇볕 잘 들어요?"

"네. 한낮에는 따가울 정도로요."


내 방 베란다는 우리 집에서 별명이 '도서관'이었다. 한때는 다리미 하나 찾기 힘들 정도로 창고나 광처럼 쓰이던 적도 있었는데 3년 전 인테리어를 마치고 나서 나도 정신을 차렸다. 베란다를 깔끔히 치우고 인형 눈깔 붙이듯 교정을 한 알바비를 탈탈 털어 책장을 여럿 장만했다. 꽁꽁 싸매 온 책들이 어지럽게 나만의 도서관 바닥에 흐트러진 채 부활할 준비를 마쳤을 때, 나는 책장에 하나하나 책을 꽂아 넣으며 저 혼자 감개가 무량했다. 방 불을 끄고 베란다 쪽 조명만 켜 두는 어느 밤에는 그 작은 도서관이 내 주제와 어울리지 않게 너무 낭만적이어서 괜스레 기분이 묘했다. 해외여행 한번 제대로 다녀보지 않은 나였지만, 여기 내 방구석 도서관이 내겐 하나의 세계였고 하나의 나라였다. 그런 예쁜 나의 도서관 베란다를 보면서 집을 보러 온 사람들은, 만족스러운 듯이 내 책과 책장과 나의 지난 17년을 훔쳐보다가,


"여기 햇볕도 잘 드나요?"

"네. 잘 들어요."


여기까지만 했어야 하지만 나는,


"한낮에는 뜨거울, 아니 따가울 정도로 햇볕에 들어요."


그래서 한낮에는 여기 못 있어요,라는 말까지는 다행히 보태지 않았다. 너를 잘 정돈하고 포장해서 무조건 너는 멋진 녀석이라고 601호를 치켜세워도 모자랄 판에 나는 은근슬쩍 너를 깔아뭉개는 언사를 일삼는다. 물건을 고르러 온 손님에게 양심 없이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우선 허울 좋은 변명이고, 사실은, 


'물건을 고르러 온' 사람들이 너를 요리조리 뜯어보며 601호를 '물건' 취급했다는 것과, 그런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평소보다 더 부지런히 너를 쓸고 닦으며 너를 최상의 '물건' 취급을 하려 애썼던 우리가, 괜히 조금은 탐탁지 않아서 심통이 났다는 것이 더 정확한 분석일 게다.



너는정확히 열네 번, 구경거리가 되었다. 낯선 사람들에게 우리가 사는 모습을 민낯 그대로 다 드러내 보인 후 결국 601호 너는 팔렸다. 나의 심통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떨리는 마음으로 도장을 찍었고 중도금을 치렀다. 이사를 앞두고 너를 떠나야 하고 너를 잊어야 하는 다음 시간으로 넘어가야만 한다. 그런데도 나의 심통은 아직 601호 언저리에 남아 있어서,


"언니, 이 방이 더 커, 저 방이 더 커?"


나보다 열다섯, 혹은 스무 살은 더 많아 보이는 양반-우리 집을 사기로 한 그 양반-이 나 보고 '언니'라며 우리 집을 제 집처럼 당당히 찾아와(뭐, 이제 곧 제 집이 되겠지만) 방 크기를 잰다며 설쳐대는 꼴을 보니 또다시 명치 언저리가 쑤신다. 언제 봤다고 반말이냐고 따져묻고 싶은 마음 대신 나는 그저,


"저 방이 더 커요."


대충 대답을 성의 없이 건네려는데, 당신 같은 동생은 결코 둔 적이 없다는데도 새 집 주인이 될 그 양반이 다시 또 내게,


"언니, 방금 내가 재 봤거든, 그런데 저 방이 더 작아. 언니 잘못 알고 있었네. (이번엔 진짜 자신의) 언니, 이 방이 더 커, 더 커. 여기에다 그거 넣고 어쩌고저쩌고..."


그래. 나는 여태 몰랐다. 17년을 살면서 601호 너의 방 크기들이 누가 크고 누가 작았는지.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너 자체로 우리였고 우리 자체로 너였는데 누가 크든 누가 작은 우리는 그곳에서 잘만 먹고 잘만 살았다. 방 크기를 지적하는 저들이, 과연 우리 삶의 크기를 알겠는가. 함부로 너의 크기를 속단하며 아는 척해도 되는 것인가. 우리는 17년이고 그들은 고작 하루 이틀인데.


"아까 화장실을 보니까 천장에 곰팡이가 좀 있던데 그것 좀 제거해 주세요."


방금 집을 보고 가 놓고 전화가 또 온다. 이사를 이틀 앞두고 다시 와서는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곧 너를 점령할 너의 주인이 나는 마뜩치가 않아서, '알겠어요.'라고 대답하는 부모님 등 뒤에 대고 수화기에 다 들리도록,



"아니 그럼 좀 일찍 와서 더 보시고 얘기를 미리 해 주시든가 하시지 하루 이틀 두고 그걸 언제 다 하라고."

라고 말하다가 고만 601호 가족 동료들에게 제지당하고 만다. 


우리는 전 주인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곧 곰팡이제거제를 들고 위태위태한 사다리를 타고 올라서서 천장을 문질러 본다. 플라스틱 천장에 낀 물때가 곰팡이제거제를 먹더니 잘도 지워진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몇 분도 안 걸린다. 이렇게나 쉬운 걸, 나는 그동안 너를 꼼꼼히 돌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의 뽀로통 심통 사건을 전해 들은 이웃 주민, 나의 동생은 내게 신중할 것을 요했다.

"잔금도 안 치렀는데 아직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면 안 되지."



잔금을 치렀어도 말이란 것은 함부로 하면 안 된다. 맞다. 게다가 우리 집을 산다는데, 601호 너를 고맙게도 사 주고 우리의 다음 터전을 마련해 준다는데, 나는 자꾸 왜 이러는가. 기꺼이 집을 사겠다는데, 기꺼이 너를 집어삼키겠다는데 나는 대체 왜 이러는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들은 오고, 그날은 온다.      



그날이 온다는데 자꾸 더 뾰족해지기만 한다. 한층 더 뾰로통해진다. 

이러다 마지막 인사 날이자 이삿날, 너를 붙들고 안 놔 줄지도 모르겠다.


이 심통쟁이, 마지막 인사를 잘할 수나 있을까.




(표지 출처: unsplash, Andre Hunter)






작가의 이전글 꼼꼼히 너를 버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