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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Jan 02. 2021

꼼꼼히 너를 버리다

이사일지 18일 차

이사일지 17일 차_생각보다 참 쉽다 (brunch.co.kr)





이사일지 18일 차_꼼꼼히 너를 버리다



꺼진 불도 다시 보듯 꺼진 601호를 다시 돌아다본다.  

              


<이사 가기 전후에 꼭 해야 할 일들 목록>

          

1. 주소 일괄이전-카드사, 건강보험료 외(전화 또는 kt무빙)

2. 자동이체 신청, 모바일 청구서로 변경-1번 중 건강보험, 은행 카드

3. 전입신고

4. 등기이전 확인

5. 상환말소 이쪽저쪽

6. 에어컨 이전 설치-제조사 혹은 이삿짐센터 여부 결정

7. 도어록 비번 초기화

8. 신문 완납 및 해지, 가톨릭식문은 주소 이전

9. 프린터 버리기

10. 관리사무소 이사 장소(주차장) 확보, 양쪽 아파트

11. 폐기물 업체 이사 전날 연락-냉장고, 세탁기 

12. 화장실 문 손잡이 고쳐 놓고 가기

13. 정수기 이전 전화

14. 도시가스 이전, 가스료 지급 문의

15. 당일 준비해 둘 현금 찾기-청소 비용, 음료 비용, 식사 비용 지급 용도 외

16. 관리비 두 달 치 이체 금액 준비

17. 셋탑박스 잘 묶어 두기

18. 이사 가자마자 바로 새로 산 가전, 에너지 효율등급 인증하고 으뜸 환급 신청하기

19. 층간소음 민원 있었는지 전 주인에게 물어보기     



이것 말고 또 있나?     


아무렇게나 할 일을 적어 본다. 너를 떠날 즈음 우리가 해야 할 일. 새로 사야 할 가구나 가전은 이제 601호가 아닌 다른 집 주소를 대야 한다. 그 다른 집 주소가 이제 우리의 삶을 껴안으며 너를 대신할 것이다. 배송 지정일도 이삿날 다음날이 되도록 꼼꼼히 점검한다. 601호, 혹여라도 너에게 배달이 오면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닐 테니까.      


아, 12번.. 화장실 문 손잡이는 잊어버리지 않고 고쳐 놓고 가야 하는데. 


“아부지, 12번 어떡하죠?”

“그러게. 흔들리더라. 얼른 이것부터 고쳐야겠는데?”     

"그렇죠. 안 고치고 가면 당연히 욕먹지."

"어디서 고치지?"

"인터넷 찾아볼게요. 똑같은 것 있겠죠, 뭐."

"찾는다고 해도 근데 누가 이걸 설치해?"

"아부지랑 나요."


     

네이버로 사진을 찍어서 유사 제품을 찾아낸다. 손잡이에도 제품명이 있다. 몇 년 전 인테리어 때 손잡이도 다 교체했었는데 화장실 손잡이가 말썽이다. 이사를 앞두고 두 달 전쯤 갑자기 스프링이 고장났다.     


"그런데 주문한 물건이 와도 고치지를 못 하면?"

"그럼 인터넷은 관두고, 아예 인테리어 집으로 가자."     


인터넷에서 사면 3만 7천 원. 집에 와서 고쳐 주면 출장비나 인건비 조금 붙으면 되겠지. 그렇게 우리는 3년 전 인테리어 집으로 향했다.      


몇 년 전에 저희가 여기서 인테리어를 했는데요, 라는 말을 시작으로 챙겨 간 손잡이를 내어놓는다. 검정 비닐봉지는 한 주먹으로 잡을 수 있게끔 길게 뻗은 묵직한 손잡이를 토해 낸다.


"아, 네."

"이거 얼마예요? 와서 수리해 주실 수 있어요?" 

    

새로 온 직원인 듯한 여자분에게 손잡이 수리 여부를 묻는다.     


"오만 원이요. 내일 가능해요."

     

내 전화번호를 적어 주고 뒤돌아서서 '이사 전후 할 일 목록'에서 하나를 곧 지울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감을 느낀다. 우리 화장실은, 그리고 우리는 내일까지만 덜컹거리면 된다.   


  

손잡이를 인테리어 집에 보여 주려고 너에게서 허락도 없이 뜯어내 버린 터라, 거실 화장실 문에는 동그란 구멍이 하나 났다. 덜컹거리던 문이 이제는 휑하기까지 하다. 

     


떠나기 전날까지 우리는 이렇게 꼼꼼히 너를 버린다. 너를 멀쩡히 고친 후 제대로 구석구석 버리려 한다.

덜컹거리던 손잡이는 이제 없다. 


그런데 너는 아직 우리 곁에 남아 계속 덜컹거린다.




(표지: unspash, Paweł Czerwiń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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