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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Dec 31. 2020

생각보다 참 쉽다

이사일지 17일 차

이사일지 16일 차_위대하고 사소한 발견을 하다 (brunch.co.kr)






이사일지 17일 차_생각보다 참 쉽다



모든 것은 생각보다 참 쉽다. 그저 버리면 된다. 우리가 이삿날 네 몸 구석구석을 버린다고 낯선 사람들에게 공지했던 그때처럼.     



"엄마, 뭐해? 뭐 적고 있어?"     


엄마가 이삿짐센터 사람들에게 남기는 쪽지에는 이렇게 쓰였다.     



‘장롱1 버립니다.’

‘장롱2 버립니다.’

‘장롱3 버립니다.’     


25년이 넘은 장롱을 우리 손으로 버린다. 

      

    

“냉장고 이사 안 갑니다. 밑에 내려만 주세요.”

“세탁기 이사 안 갑니다. 밑에 내려만 주세요.”      



새로 이사 가는 곳에 붙박이장이 많아서 장롱은 두 짝만 사기로 했다. 그래서 열두 자짜리 옛 장롱, 산 지 30년이 다 된 장롱은 폐기하기로 했다. 소나무가 울퉁불퉁 튀어나와 있는 짙은 갈색의 장롱이었다. 이삿집 업체가 사다리차로 내려 주면 스티커를 붙여 재활용 쓰레기장에 버리기로 했다. 경비 아저씨들께 미리 스티커 값은 지불했다.          


가구의 노잣돈에 들어간 돈은 5만 원.


가구의 마지막 가는 길을, 시간이 없어 보지도 못한 채 황급히 떠나왔다. 가전 두 개는 업체를 불러 무료로 가져가 달라고 했다. 버리는 일은 의외로 참 쉽다. 우리의 의식주를 온통 책임졌던 녀석들이 우리에게서 작별을 고하고 갈래갈래 흩어진다. 

      


시원한 물과 커피, 준비했습니다. 목마를 때 드세요.


때는 무더운 여름날. 식탁 위에 생수 30개와 커피 10개. 새벽까지 시원한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음료수들을 아침이 되어서야 꺼냈다. 아직 그 냉기가 여전하다. 601호, 너에게서 맞이하는 마지막 손님 접대. 밖에서 커다란 바퀴소리가 들린다. 그들이 도착했나 보다. 



이제 너를 정말 버리는 날이다. 

더 버려야 할 것은 없을까. 우리 지금, 꼼꼼히 너를 잘 떠나고 있는 것일까? 

꺼진 불도 다시 보듯 꺼진 너를 다시 돌아다본다. 




(표지: unsplash, Norbert Kundr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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