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순전히 제 생각인데요, 아직 미련이 남은 거라면 한번 지원이라도…….”
지원이라도 해 볼 수 있는 거 아닐까요,라고 전 직장 동료 분이 내게 말씀하신다. 직장이 싫어서 떠난 것도 아니고, 이제 내 퇴사 원인의 팔 할이었던 그 사람도 직장을 떠났다고 한다. 직장에서 나를 받아 줄지 거부할지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이 말을 들으니 돌아가겠다는 마음 정도야 먹어도 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직도 나는 내가 일하던 곳의 햇볕과 그늘을 종종 그리워하고 있다. 또한 우리말을 체험하기 위해 재잘거리며 활동지를 받아 가던 고 귀여운 녀석들의 대책 없음과 엉뚱함을 다시 한번 보고 싶기도 하다.
“헐. 너 괜히 관뒀다, 야!”
친구 몇몇은 나의 그녀(나와 갈등이 있던 그녀)가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말에 대뜸 이런 말부터 나에게 타전한다. 그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참아볼 것을 그랬다고 내 인내를 탓하거나, 나의 미래를 나보다도 더 안타까워한다. ‘그만두지 말아야 할 이유’를 목록으로 줄줄이 뽑아 주던 친구들이라 ‘좀 더 버텼어야 해.’라거나 ‘다시 돌아가면 안 되는 거야?’라고 내게 질문해 오기도 한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기어 나온 동굴에 도로 기어들어갈 만큼 진하고 짙은 미련이 남은 것까지는 아니다. 아직도 문득 ‘내가 미쳤지, 꼬박꼬박 월급 나오는 직장을 박차고 나와서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고생이냐’ 싶을 때도 물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다시 돌아가서 똑같은 일을 하고 비슷한 말들을 매일 반복하고, 둘뿐이어야 하는 근무 환경에서 또다시 ‘내 퇴사 이유’를 만들 만큼 ‘배짱 두둑한 미련’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란 소리다.
게다가 퇴사 후 내가 하는 지금의 ‘생고생’들이 어떨 땐 꽤나 달콤하다. 이 생고생들의 재료가 ‘쓴 마늘’과 ‘생강’뿐이었다는 사실조차 종종 잊는다. (나는 아마 이 마늘과 생강을 집어먹으며, 백 일이든 천 일이든 잘 기다렸다가 기어코 ‘내가 원하는 나’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철없게도 허무맹랑한 나의 이 믿음을 아직도 신뢰하고 있다.)
방금 나온 직장에 다시 고개를 들이밀지 않으려는 이유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도 아니고, ‘기껏 다시 굽실굽실 지원했는데 거절당하게 될까 봐 두렵다.’는 마음 때문만도 아니다.
단지 그것은 앞으로의 나의 삶이 아니다.
내 삶은 내가 살아야 하고, 내가 사는 삶이 온전히 나의 삶이어야 하는데 어쩐지 그쪽 세계의 삶은 나를 숨기고 나를 버티게 하고 나를 ‘대단치 않은 존재’로 만들었던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동료가 보냈던 시선 때문일 수도, 내가 나 자신에게 왜곡된 눈빛을 보낸 탓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그 삶은 끝났고 다른 삶이 이제 대기 중이다. 나는 이왕 닫힌 문은 더 굳게 비틀어 잠그고 우선 새 문으로, 적어도 나를 반기고 내가 좋아하는 문 쪽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지금 나는 편집자 공부를 하면서, 그리고 아는 분의 출판사 일을 조금이나마 도우면서 전에 없이 희열을 느끼고 있다. ‘희열’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이 너무 추상적이고 진부하지만, 말 그대로 나는 글자에 관한 일을 하며, 글에 대한 끄적거림을 책으로 엮어 나가며 ‘희열’을 느낀다. 내가 나 자신이 아닌 듯한 물아일체의 경지에까지 종종 다녀오곤 한다. 그것을 다른 단어로도 해석한다면 아마 ‘몰입’이 아닐까 싶다.
나는 실로 오랜만에 나 자신에게 몰입하고 있다.
몰입은 나에게 평온을 준다. ‘마음껏 평온해도 되는 나’를 내 하루에 내어 준다. 온갖 불안으로 덜컹거릴 때도 있지만 ‘온갖 것’을 해대며, ‘가지가지한다’는 소리를 들으며, 내 삶에 진실로 몰입하고 싶다. 내 수많은 가지에서 어떤 ‘몰입’의 꽃들이 피어날지, 어떤 열매가 매달릴지 ‘나’라는 나무, 은근히 기대된다.
나는 아마도 땅을 디디는 대신, 물 위를 흐르는 나무로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몰입의 대가라면, 얼마든지 천천히 흐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