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일기_가지가지 한다, 그 첫 번째 가지

by 봄책장봄먼지

온갖 걸 다 해요.



우리 가족에게는 ‘가족 캘린더’가 있다. 직장 내에서 일정 공유를 위해 모바일 캘린더를 사용하곤 했는데, 쓰다 보니 우리 가족에게도 매우 필요한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찮다는 가족들을 꼬드겨서 각자의 휴대폰에 가족 캘린더를 깔고 서로의 일정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네 살배기 쌍둥이 어르신들이 있는데, 이 어르신들의 일정과 식사, 기분 등을 적절히 맞추기 위해 우리 어른들은 스케줄 관리를 해야만 한다. 어느 날 누가 시간이 되는지,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육아를 할 수 있는 인력은 누구인지, 우리는 이 가족 캘린더를 이용해 꼼꼼히 육아 인력을 살피고 서로의 일정을 공개적으로 염탐하기로 했다.)


퇴사자가 되었으므로 일정이 없다. 그러니, 이 가족 캘린더에서 이제 내 자리는 점점 휑해져야 할 참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백수가 되어 버린’ 나의 일정이 의외로, 상상외로 퍽퍽하다. 오늘로 3월 15일이 되었는데 열심히 일하는 다른 가족들 못지않게, 아니 그들보다 더 촘촘히 내 일정이 이 3월의 봄을 가득 채우고 있다.


또 뭐를 배우려고? 한 가지만 제대로 하지.


바로 그거다. 나는 지금 그 한 가지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 이것저것을 배운다. 나의 글을 짓고 만들고, 때로는 타인의 글과 삶도 편집해 주고 싶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 삶에 이것저것을 다 갖다 쓰고 있다. 그저께는 수강 신청 시간에 맞추어 ‘새로 고침’을 해 가며 12명뿐인 정원 안에 들려고 도서관 문화 강좌 ‘클릭질’에 여념이 없었다. 수강료가 교재비뿐이거나 최대 3만 원인 강좌이다 보니 경쟁률이 치열했다. 물론, 나는 백수이므로 오전 10시에 하는 ‘기초 드로잉’ 수업과, 같은 날 오후 6시 30분에 시작하는 ‘왕초보 포토샵’도 거뜬히 신청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나의 클릭은 기어이 세상에게서 응답을 얻어 냈다.



[○○도서관] 왕초보 포토샵

-수강 승인된 분들께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 첫 수업: 3/26(화) 18:30~21:00

● 장소: ○○도서관 3층 웹툰창작체험관

● 교재비: 11,000원(수업 첫날 강사에게 직접 납부)

● 준비물: 필기도구, USB

수강 취소하시는 분들은 아래 전화번호로 3/21(목)까지 전화 주시기 바랍니다.

☎○○○○-○○○○(문화행사 담당)



게다가 나는 요즘 월요일마다 한창 ‘작가와 에디터를 위한 편집자 과정’(총 5회기, 출판사 siso 주관)을 듣고 있다. 어제도 수업 중에 교정 및 교열 연습을 하다가 모르는 게 또 나와서 한 번 더 화들짝 놀랐다. 이렇게 모르는 것 천지라 나의 인생 진도는 여전히 더디기만 하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쓸 수 있는 글들이 많다는 게 참 감사하다.



월요일에는 위에서 말한 ‘편집자 과정’을 듣고, 화요일에는 이제 곧 ‘기초 드로잉’과 ‘왕초보 포토샵’을 듣는다. 그러고 나서 수요일에는 고래사진관에서 진행하는 ‘나만의 책 만들기’ 수업을 듣는다. 시작한 지 2주가 지났는데, 같이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밝고 예쁜 분들이라(물론 나만 빼고) 절로 생동감 넘치는 수업이 되고 있다. 자신들보다 10살이나 많고, 인디자인을 한 차례 배워 놓고도 또 버벅거리는 나 같은 사람을, 그네들은 점잖게 기다려 주고 ‘이거 눌러 보세요’, ‘저거 눌러 보세요’ 하면서 가르쳐 주기까지 한다. (그 ‘책 만들기 수업’ 덕분에 이렇게 나는 ‘돌고 돌아 퇴사일기’라는 책까지 내게 되었다. ‘가지가지’의 덕분이다.)



가지가지 한다


흔히들 ‘가지가지 한다’고들 말한다. 이 문장에는 조금의 비아냥이 녹아들어 있기도 하다. 나의 모습에도 이렇게 ‘가지가지’가 잔뜩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온갖 걸 다 하네.’라든지 ‘가지가지 한다.’라는 말이 참 듣기 좋다. ‘가지가지’는 왠지 모르게 ‘멈춰 있지 아니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뜻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나는 퇴사라는 첫 번째 가지를 무사히 잘 쳐냈다. ‘가지가지’가 꽤 순조롭게 출발을 한 셈이다. 거기다 나는 그 가지를 제법 ‘훌륭히 쳐냈다’고도 생각한다. 딱히 누구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고 직장 생활을 마무리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의 이 가지치기는 ‘훌륭했다’고 자화자찬을 해 본다.


‘가지치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첫째 가지가 나와야 그다음 가지도 순서대로 다음 길을 낸다는 점이다. 물론 마지막으로 출근을 하던 날 나는 ‘가지치기’에 대한 의구심이 많았다. ‘퇴사’라는 가지를 쳐내게 되면 내 하늘이 두 쪽이라도 나는 것이 아닐까 저어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설령 두 쪽이 나면 또 어떠하랴?

두 쪽 세상이 되면 두 가지 세상으로 쪼개어 나눠 쓰고, 세 쪽이 나면 세 가지 세상에서 이것저것 많이 열매 맺고, 달고 쓰고 맵고 짜고 맛있는 그 열매들을 골고루 다 먹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눈팔지 말고 자기 우물 하나라도 제대로 파라고 나의 어른들은 내게 노파심을 보내오곤 한다. 하지만 한 우물을 파기 위해서는 여기저기 가지치기하는 일도 때로는 필요하다. 나는 덩그러니 뿌리 하나만 남은 나무는 싫다. 흔들리는 가지들일지라도 주섬주섬 흩날리는 나무이고 싶다. 물론 뿌리를 내리기 위해 자기 땅을 파고 자신의 다리를 땅 아래로 곧게 펴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지금 이 퇴사자는 이 하늘, 저 하늘로 분주히 내 팔을 휘저으며 내가 만들고 살릴 수 있는 가지들을 마음껏 뻗쳐 보고 싶다. 뻗다가 그게 아니면 잘 쳐내면 그만이다. 쳐내야 가지가 살고 줄기가 살고 내 뿌리가 더 튼튼히 이 세상을 버텨 줄 것이다.



나도 안다. 아직 어찌 될지 아무것도 모르는 세상 속이다. 어떤 바람이 내게 불어올지 나도 잘 모른다. 풍파일지 봄바람일지, 또 그 바람의 결이 격정적일지 살랑일지 나도 내 눈앞을 가늠조차 못 한다. 하지만 이 가지 저 가지를 맺다 보면 끝내 ‘나’라는 나무의 숱은 풍성해질 것이고, 비바람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버티는 법을, 나는 끝끝내 익히고야 말 것이다.



이 퇴사자, 이제 가지가지에 주렁주렁 열매 맺을 일만 남았다. 마음먹기에 따라 앞으로의 삶, 어쩌면 인내도 달고 열매는 진짜 더욱더 달지 모른다. 혹여 씁쓸한 이파리가 이따금 씹힐 때면 단내가 날 때까지 내 귀한 이파리들을 꼭꼭 잘 씹어 보리라.



퇴사자, 정말 가지가지 잘~ 헌다. 얼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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