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가 관둔다고 할 줄이야.
내가 너에게 미묘한(?) 구박은 했을지언정 그게 널 떠나게 만들 줄은 몰랐다. 처음부터 너를 여기서 내보내려고 너를 몰아세운 건 아니었지. 물론 네가 그만둔다는 말을 하자마자 나도 마음이 편해지긴 했어. 게다가 네가 나랑 밥까지 안 먹는다고 선언을 하니, 뭐랄까, 나는 이 문제를 ‘손 안 대고 코 푼 느낌’이랄까? 아무튼 너 스스로 밥줄을 끊은 거, 너의 그 선택 덕에 나도 좀 쉬어 갈 수 있었지.
그런데 너, 퇴사 일기를 쓰며 날 강제 소환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퇴사가 뭐 대단한 자랑이라고, 너, 블로그에 30개나 되는 퇴사 일기를 썼더라? 그러니까 퇴사 일기를 빙자한 내 욕 같은 거를 쓰고 다녔더라? 참나. 세상 순진하고 저 혼자 착한 척은 다 하더니, 누구 마음대로 날 네 글의 주인공으로 만든 거지? 네 퇴사 일기를 보면 나는 순전히 ‘나쁜 X’이더라. 그거 아니? 눈치 없고 일도 못 하고, ‘월급 루팡’ 같은 데다가 직장을 2년 가까이 다니고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너, 그런 네가 나한테는 더 ‘나쁜 X’이었다고!!
난 정말 끝까지 네가 싫더라.
달랑 너와 나만 같은 회사 소속인데 평소에 넌 회사 회식에도 참석하지 않으려 하고, 또 ○○관님 송별회까지 안 가다니. 너, 사회생활 왜 그렇게 하니? 회식뿐 아니라 평소 일을 할 때도 너 왜 그렇게 남에게 의지하고 의탁해? 내가 네 엄마니, 네 신이니? 왜 걸핏하면 나한테 물어보니? 좀 알아서 할 수는 없었어?
그리고 너, 항상 최종 결정권자여야 했던 내 입장 생각해 봤어? 게다가 용역 책임자는 매번 바뀌지, 바뀔 때마다 다들 이 업무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나한테만 자꾸 물어보고 뭔가를 해 달라 하지……. 진짜 나도 여기저기서 치고 들어와서 말도 못 하게 힘들었다고. 너만 힘들었다고 생각해? 너 혼자 힘든 척하며 떠나는 그 꼴, 솔직히 보기 안 좋았고 우습더라. 난 그런 네가 끝까지 별로였어.
나는 늘 너와 아무런 인사도 나누지 않으려 했어. 너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쓸어 담았지. 내 눈엔 네가 너무 부족해 보여. 아니, 그냥 너라는 존재가 자꾸 싫어지더라. 물론 너도 나를 점점 그런 존재로 취급했지. 서로가 서로에게 투명 인간이자 ‘싫은 인간’이 된 거지.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는 나도 몰라. 뭐, 원인이 어디에 있건 간에 반성은 나뿐 아니라 너도 해야 해. 이제 너만 상처받은 척 좀 하지 말라고!
마지막 인사는 ‘고개 까딱’이 좋겠어.
보는 눈들이 있으니 너 가는 마지막 날, 나도 인사는 했어. 그동안 네 인사에 고개도 안 돌렸던 거, 뭐 사실 나도 내가 좀 유치했었다는 생각도 들었어. 그런데 너도 나랑 똑같더라. 그래도 한 해의 마지막 날인 31일이고, 게다가 너 마지막 출근 날이기도 해서 다른 동료들이 같이 밥 먹자고까지 했었는데, 너 끝내 안 가더라. 나, 네가 안 갈 줄은 몰랐어. 약속 있다는 핑계까지 대면서 말이지.
내가 전에 너한테 이야기했었지? 내가 싫어 퇴사했다던 네 전임자 얘기 말이야. 그 선생도 막판에 고구마를 싸 오더라. 너도 어딘가에서 궁상을 떨며 이 추운 겨울, 혼자서 너만의 점심을 입속에 욱여넣고 있겠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튼 너, 마음에 참 안 들어. 너한테는 고개를 까딱하는 인사조차 아까울지 모르지.
아마도 난 냉장고 속 방치된 방울토마토 같은?
아마도 너한테 나는 방울토마토 같은 존재였나 보다. 내가 2월에 너에게 줬던 방울토마토, 기억나? 너는 그 방울토마토를 사무실 냉장고에 두고 몇 개월이나 방치했더라? 사람이 성의가 있지, 어떻게 그런 걸 잊어버릴 수가 있어? 내가 방울토마토 이야기를 꺼내자 너는 당황했지, 미안하다고도 했고. 미안할 일은 애초에 만들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닐까? 건망증을 빙자한 너의 그 무심함이 난 이해가 안 간다. 너는 나를 그 썩은 방울토마토처럼 취급했던 걸까?
너는 우리 관계가 서서히 얼어붙고 있을 때조차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지. 내가 화를 낼 때, 너는 왜 한 번도 제대로 물어보지 않았을까? 엉킨 이 관계를 풀 생각 같은 건 전혀 안 하고, 너, 그냥 우리 관계를 거기 그대로 놔두더라. 네가 네 입으로도 나한테 그랬잖아.
“그땐 더 노력할 마음이 안 생기더라고요.”
우리 관계에 대해 더는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는 그 말이 난 더 충격이었어. 우리 관계는 그즈음 완전히 부패되었던 거지.
내가 따뜻한 봄날 너에게 건넸으나 이제는 완전히 썩어 버린 겨울 속 그 방울토마토처럼…….
사실 나도 그만둔다.
나 그만뒀어. 물론 넌 몰랐겠지. 네가 관두고 나간 후 벌어진 일이니까. 그래, 나, 사실 엊그제 그만뒀어. 퇴사할 마음은 어느 정도 먹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결정하게 될 줄은 몰랐어. 너처럼 한 달 전에 퇴사를 말하고, 너처럼 마음의 준비를 오래 한 것도 아니고, 너처럼 약식 환송회를 받은 것도 아니었지. 난 그냥 갑자기 이곳을 나왔어. 업체가 제시한 조건이 내 조건이랑 안 맞았다고만 해 두자.
아무튼 그렇게 반년을 헤맨 우리 사이, 서로 무시하고 미워하고 돌보지도 않던 우리 관계, 근데……. 우리 대체 뭐한 거니? 어차피 다들 여기를 떠날 거였다면 애초에 너랑 나, 왜 그렇게 틀어져야 했던 거지?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 대체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의 '너': 봄먼지, 이 글에서의 '나': 봄먼지의 전 직장 동료)
인수인계가 굳이 필요 없었다. 남아 있는 동료가 워낙 일에 대해서는 빠삭했고 내 일은 동료의 일과 백 퍼센트 겹치는 일이었기에. 그런데 그제 사업 담당 선생님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것저것 파일들이 어딨는지, 그리고 우리의 공용 메일 비번은 뭐였는지 나에게 물어 왔다. ‘아니, 그녀가 있는데 그걸 왜 나에게 묻지?’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나와 갈등이 있던 rm 동료도 하루아침에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새로 오는 업체와 뭐가 잘 안 맞았나 보다. 능력만큼은 출중하던 사람이었는데 그깟 돈 몇 푼 아낀다고 업체나 원이나 사람을 그냥 제 발로 걸어 나가게 했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에겐 씻기 힘든 상처를 준 그녀지만 그녀 인생도 나처럼 잘 풀리지는 않는구나 싶어 마음이 그리 개운치만은 않았다. 이렇게 너도, 나도 그만두게 될 거였으면 우리, 그동안 왜 그렇게 마지막까지 서로를 미워했던 건지, 그 이유라도 알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 그 모든 게 다 무슨 소용이었을까 헛웃음만 나온다.
이제 그녀도 나도 서로를 알지 못하는 각자의 삶 안에서 치열하게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단지, 나는 잠시 그녀 입장이 되어 위와 같이 편지글을 쓰면서 글자로나마 그녀를 이해하는 척을 해 본다. 언젠가 나도 그녀도 서로를 용서하길 빈다.
그것이 우리 사이에서 가능한 일이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