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일기_생각보다꽤 괜찮습니다만,

퇴린이의퇴사일기

by 봄책장봄먼지

세상에서 가장 아리송한 맛, 퇴사의 빵. 씁쓸한 것 같기도 하고 당장은 달콤한 것 같기도 한 이 빵. 우리는 어떤 빵을 먹으며 직장인으로, 혹은 퇴사자로서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저기 저쪽에 퇴사자 한 명이 보인다. 때는 새해가 시작된 1월 2일 오전. 가만 보니 이자, 갓 구운 뜨끈한 ‘퇴사빵’ 하나를 들고서 가벼운 발놀림으로 집을 나서고 있다. 그자의 뒤를 한번 따라가 보자. 묵직한 종이 가방을 들고도 사뿐사뿐 걷는 저자의 뒤통수가 어쩐지 좀 수상하다.



옆으로 스쳐 걸으며 언뜻 그를 훔쳐본다. 빨간 종이 가방에는 웬 동전들이 잔뜩 들어 있다. 꽤 묵직해 보인다. 아주 많지는 않지만 한 끼니 정도의 값? 누군가와 가벼운 점심을 먹을 수 있는 분량이다. 들여다보니 종이 가방 안은 영 질서가 없고, 십 원과 오십 원 사이에 간간이 오백 원들도 눈에 뜨인다. 돈을 보자 나도 모르게 군침이 흘러나온다. 아마 이 퇴사자, 은행에 가려나 보다.



아하! 그러고 보니 이 사람, 평일에도 은행에 들를 수 있다는 ‘평일 은행 자격증’을 며칠 전에 발급받았다. (백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격증은 써먹어야 제맛이라는 듯 1월 2일, 은행이 연초의 첫 문을 열자마자, 퇴사자는 묵혀 둔 동전들과 함께 집을 나선다. 모 개그맨의 말대로 ‘티끌 모아 티끌’을 얻으려고 부단한 걸음을 내디디는 중인가 보다.



인제 동전 기계 없어요.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망연자실한 퇴사자의 표정을 본다. 조카들 과잣값이라도 모으려고 집 안에 있는 동전을 다 긁어모아 왔다고 한다. (심지어 부모님한테까지 동전을 내어놓으라고 했다던데 이게 무슨 조홧속인가. 동전 기계가 퇴출됐다니.) 퇴사자가 아득해지는 머리를 부여잡고 직원에게 묻는다. 그가 답한다. 동전 기계는 동전을 자동으로 분류해 주지만, 지금 우리 은행은 그런 기계가 없으며, 이제부터는 집에서 단위별로 다 분류를 해 와야 한다고. 하아. 연초부터 이게 무슨 ‘생쑈’란 말인가. 하지만 퇴사자는 골똘히 정신을 가다듬는다. 퇴사자는 심호흡을 한 뒤 자신이 이 은행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본다. 그녀는 곧이어 번호표를 하나 뽑는다.



“휴면 계좌가 아니라 거래 중지 계좌네요.”

2019번! 2019번! 자기 번호가 불리자 퇴사자는 창구로 간다. 퇴사자는, 저기요, 제가 잠자고 있는 계좌가 하나 있어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상대는 퇴사자에게 ‘당신에게 휴면 계좌 같은 건 없다’고 단언을 한다.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으니 혹시 없어진 것인가. 그런데 은행 직원이 여기저기를 더 뒤져보더니 “오, 있네요, 하나.”라고 퇴사자에게 다시 말한다.


“이 계좌는 폐쇄할게요. 여기에 잔액 있는데 이건 어떻게 해 드릴까요? 새 계좌를 만드시겠어요?”

“네. 통장을 만들어 주세요, 새 통장으로. 아, 그리고 체크카드도.”


주위를 둘러보니 이 은행, 종이로 된 입출금 전표도 없다. 다 디지털로 바뀌었다고 한다. 통장을 만들 때도 종이 말고 태블릿에 열심히 사인을 하고 또 사인을 하며, 여자는 통장을 하나 개설한다. 게다가 거래 중지 계좌에 만 원이나 있었다며 이 퇴사자, 너무나 좋아한다. 그런데 하나하나 지겹도록 여러 개의 사인을 하다 보니, 이런……. ‘직장 기입란’이란 것이 있다. 이곳은 선택 사항이다. 퇴사자는 멈칫한다. 그자는 지금 이 부분을 아예 선택할 수가 없다. (이때, 퇴사자의 표정이 잠시 씁쓸해 보였지만 여느 드라마의 주인공 ‘캔디’처럼 다시 가까스로 '극복'의 표정을 지으며 훌훌 털어 낸다. 퇴사 후 첫 공식 활동인데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 디지털 펜을 쥔 그자의 손이 허공에 잠시 머무르다가 ‘직장 기입란’을 스치듯 비껴 나간다. 직장이라는 빈칸에 몇 글자라도 채울 수 있었던 시간들을 떠올린다. 아무렇지 않게 누렸던 것들이 실은 매우 감사한 순간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뻔한 감사들을, 퇴사자가 되고서야 겨우 추억한다.)



“저기, 이거 바꾸실 거면, 제가.”


오잉? 그런데 아까 안내를 해 주시던 직원분이 갑자기 창구 앞에 앉아 있는 퇴사자에게 다가와서 이자의 종이 가방을 가져간다. 그분께서 퇴사자의 심정을 친히 눈치채고 그자의 동전을 잠시 뺏어 가기로 했나 보다. 헛, 아무것도 못 하고 은행에서 되돌아 나올 줄 알았는데 이거 뭐지? 완전 ‘한번에!’ 다 해결이잖아! 퇴사자가 히히거리고 있을 때 그분께서 동전의 액수를 알려 준다. 그 돈은 지금 만들고 있는 내 새 통장에 집어넣기로 한다. 백수의 출발이 좋다. 백수가 되자마자 적지만 뜻깊은 돈이 갑자기 ‘짠!’하고 생긴다!



11시 30분부터는 붐비는 시간이오니…….


붐비는 시간은 11시 30분부터라고 그 시간을 피해서 영업점을 방문해 달라는 은행 문구를 본다. 퇴사자는 ‘그렇게 하마.’라고 마음속으로 응답한다. 이제 백수라 11시 30분 전에 얼마든지 올 수 있다. 붐비는 시간에 한 놈(그 퇴사자)만 빠져 줘도 은행의 상황은 한결 더 수월할 것이다. 점심시간에 은행 업무를 봐야 하는 신생 입사자, 혹은 오래된 입사자(경력자)들을 배려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이게 ‘가진 자?’의 여유인가 보다.)


마음의 여유와 시간의 여유가 딱히 비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퇴사자, 아무튼 아직 백수 초기라 그런지 남아도는 시간만큼이나 마음까지 꽤 여유롭다.(이게 며칠을 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이 퇴사자, 집에 와서 카○○뱅크 26주 적금에 도전한다. 열심히 새 통장을 만들고 티끌을 모으는 이 퇴사자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니, 나도 문득 금전에 대한 의욕이 생긴다. 집에 오자마자 휴대폰을 켜고 적금 하나를 들어 본다. 1주에 1,000원씩 증액되는 적금으로, 7월 말이 되면 30만 원 정도를 탈 수 있다고 한다. ‘티끌 모아 티끌’이라지만 티끌도 꽤 모으면 거참 쓸 만은 하네, 싶다.



퇴사자, 이 허허벌판에 홀로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얄팍한 주머니 사정이 먼저 거슬리기 시작한다. 새 통장을 만들고 ‘내 것이었으나 내가 놓치고 있던 동전들’, ‘휴면 계좌나 거래 중지 계좌들의 잔금’도 박박 긁어모아 본다. 이제 자린고비 모드로 변환해야 할 시점이다. 퇴사하고서야 경제관념이 생기는 거냐고 가족들에게 따뜻한 잔소리를 들으며, 퇴사자 그녀, 오늘도 아껴 쓰고 아껴 쓰기 위해 돈도, 시간도 절약한다.



어찌 되었든 아직까지 이 퇴사빵, 생각보다 꽤 맛있다.


꽤 달콤한 이 퇴사빵, (물론 머잖아 과도한 불안감으로 발효되겠지만) 이 빵을, 아직은 유유히, 맛 좋게, 꽤 오랜 시간 소일거리 하듯 씹고 즐기며 먹어 보련다.



퇴사자, 은근히, 그러나 격하게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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