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월요일, 나의 일과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0830_마지막 출근
늑장을 부리며 사무실에 도착. 제법 손이 시린 날씨. 오늘따라 마음까지 시릿시릿 느릿느릿. 늘 보던 풍경이 더 애잔해 보이는 것은 아마도 ‘퇴사 당일’이라는 기분 탓. 어젯밤 물에 푹 담가 놓았던 내 ‘멜랑콜리’한 기분을 다시 들춰 보니, 하룻밤 사이에 젖은 솜처럼 더 축 처지고 더 무거워짐.
1130_전, 점심 약속 있어요
“한 해의 마지막 날인데 다 같이 점심 드시러 가실래요?”
한 해의 마지막 날이자 이곳에서의 마지막 날. 4명만 남은 사무실 점심시간. 눈 딱 감고 그냥 겉웃음 지으면 되지만, 내 퇴사 이유(한 사람)도 그 자리에 동반한다기에,
“저, 약속 있어요.(길고양이들이랑요.)”
‘마지막 날이니 더 마음 편히 먹을래요.’라는 말도 슬쩍 흘리며 ‘혼자’를 선택. 무리에서 빠져나와 김밥 포장을 펼치니, 돌돌돌 김을 싸맨 밥알들과 단무지, 시금치, 달걀, 햄 들이 나의 퇴사를 맛 좋게 응원. 게다가 내게 퇴사 인사를 하려는 듯 그 동네 길고양이들을, 그날따라 아홉 마리나 만남.
1200_신과 함께
직장 근처 성당. 이제 이 성당에 언제 다시 돌아올는지, 기약은 미지수. 그저 기도 위에 기도를 더 포개어 맞댄 내 이 두 손이 갈등과 미움이라는 매듭을 풀고 행복한 평화가 있는 곳으로 그 걸음을 옮길 수 있기를…. 기도는 빳빳하게 말라 버린 내 가슴을 적시고, 염도가 포함된 두 개의 물줄기를 내 두 눈에서 뽑아냄.
1330_수다와 얼그레이
“훈○쌤, 계세요? 같이 차랑 케이크 먹어요~”
점심 먹으러 나갔던 동료들이 내 취향까지 파악하여 얼그레이를 건넴. 얼그레이의 진한 향이 코끝에 와 살짝 걸터앉음. 나는 그 향에다 2018년의 퍽퍽했던 시간들을 함께 집어넣고 뜨거운 입김으로 녹여 버림. 테이블에 가득 퍼지는 수다가 퇴사라는 추위까지 녹임. 물론 지금 이 자리, 하필 내 퇴사 이유를 차지하는 그 동료도 같이 앉아 있음. 하지만 얼그레이 향이 퍼지는 속도와 깊이에 잠시 그 사실을 잊어 봄. 그렇게 마지막 날이 얼그레이 속으로 흘러 들어감.
1530_전화번호 좀
전번(전화번호) 교환. 나는 핵인싸 아닌 핵아싸(아싸: 아웃사이더)라 우리 과 동료들보다 청소하시는 선생님과 더 친함. 3년 후면 ‘정년퇴직’이라시던 이 선생님과는 평소에도 신상을 공개하며 서로를 돕기로 약속했던 사이. 나는 컴퓨터 사용에 관한 잔기술을 제공하기로 했고, 선생님께서는 내게 가볍고 잘 빨리는 파란 걸레를 세 개나 제공해 주셨음. 게다가 우리 체험처를 격렬히 청소해 주셨음. 그러나 나는 약속만 하고 별다른 것을 해 드리진 못함. 나만 도움을 받음. 그럼에도 선생님은 전화번호라도 알고 지내자고 하심. 기분 좋게 전화번호를 넘김. 퇴사가 이렇게 사람을 이어 주기도 함.
1630_일은 늘 거기 있는 것이구나
유유히 떠나고자 하나 마지막까지 이것저것 할 일이 도착. 게다가 컴퓨터 폴더 정리도 엉망. 그동안 미처 완성하지 못한 인수인계 파일도 벼락치기로 작성. 상황상 지금 당장은 인계자가 없어 자꾸 게을러진 탓. 내가 없더라도 누군가의 컴퓨터가 될 이 녀석을 보며, 너도 앞으로 고생이 많겠다고, 그리고 너도 그동안 참 고생이 많았다고 너(컴)와의 마지막 인증 사진을 찍어 봄. 이제 나는 너에게서 영원히 로그아웃.
1730_그녀 도착
‘역에 도착!’이라는 문자가 도착함. 내 영원한 팬이 직장 근처에 도착했다는 소식. 그 사람은 바로 나의 엄니!! 처음 이 직장에 들어간다 했을 때, 나만큼이나 큰 크기의 웃음을 지어 주셨던 우리 어머니가 ‘퇴사 마중’을 나오신 것.
1800_마지막 칼퇴
직장에서 쓰는 마지막 보고 메일에는 ‘감사’를 과거형으로 적고, 인사는 ‘안녕히 계세요.’와 말줄임표의 ‘……(점점점점점점)’으로 처리. 마지막이라는 타이밍 때문인지 선생님들이 아련한 눈을 내게 흔들어 주시고, 어떤 분은 두 팔 벌려 나를 포옹해 주심. 내일부터 여기 ‘나였던 자리’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대체 무슨 뜻일지 아직도 실감은 제로. 마지막 칼퇴를 하며 방재실과 방호경비 선생님들께도 ‘안물안궁(안 물어봤고 안 궁금함)’이실 내 퇴사와 감사를 넌지시 건네며 새해 복도 전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 관둬요.”
“……. (아. 그런데 그래서요? 안물안궁인데.)”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아, 네에.”
1805_그녀를 만나는 곳 50미터 전
퇴사 마중이 씁쓸할 법도 하지만 엄니는 그 나름 발랄하게 ‘○호야!’고 나를 부르심. (다 늙은 딸내미 퇴사 마중인 데다 직장 근처라 내 이름을 대놓고 부르기 멋쩍으셨는지, 엄니는 나를 부를 때, 내 이름을 아니 부르심. 조카 이름을 부르시는데도 난 귀가 번쩍! 오잉? 내 사랑 조카 호니의 이름? 하고 고개를 돌림.) 언제 봐도 반갑고 그립고 귀여운! 우리 엄니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계심. 엄니와 팔짱을 끼고 내 영원한 고향 ‘우리 집’으로 출발.
2030_퇴사 파티(feat. 삼겹살과 닭봉, 막걸리)
동생과 제부 씨(쌍둥이 조카 아비)가 송년 파티 겸 퇴사 파티를 해 준다기에 퇴근하자마자 곧장 내 집 대신 동생네 집으로. 미리 재어 놓았다던 닭봉은 정말 송구영신을 장식하기에 부족함 없이 달콤한 맛이었고, 적절한 굽기, 적정한 온도의 삼겹살은 쌍둥이 할아버지도 반할 만한 맛이었음. 어른들은 막걸리를, 아이들은 우유를 한 잔씩 들고 건배. 퇴사가 2018년의 마지막과 함께 깊어지고 있는 이 밤, 우리 쌍둥이 조카들도 이제 만 4년을 향해 가는, 어느 뜨거운 퇴사의 밤, 12월 31일 세밑 그 밤.
0000_2019년으로 드디어 입사
가족이 손을 맞잡고 카운트다운을 세기 시작. 10, 9, 8, 7, 6, 5, 4, 3, 2, 1. 드디어 2019. 특히 나에게는 더없이 다사다난했던 2018년이 막을 내리고, 우리 가족 모두 무사히 2018년에서 퇴사하여 2019년으로 입사. 2018년을 보내 버린 것이 새삼 감사함. 이제 내 지난 6개월(의 갈등과 격랑)을 충분히 애도한 후 나의 퇴사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시간.
“2018년을 종료하는 중입니다.”
0001_다시 시작
드디어 2019년으로 들어옴. 그럼에도 아직 남아 있는 2018의 찌꺼기가 많음. 하나씩 버리고 말끔히 씻어서 작년의 설거지를 이제라도 마무리해야겠음. 그리고 아주 깨끗한 그릇에 나의 새 반찬을 보기 좋게 올려놓아야겠다는 생각. 제일 맛없는 밥은 ‘먹다가 식은 밥’이고, 가장 맛있는 밥을 ‘갓 지은 새 밥’일 것. 나는 이제 고슬고슬한 ‘2019년의 새 밥 한 공기’를 시작하려는 중. 벌써부터 2019년에 군침이 돎.
“나는 지금 (2018년의) 나를 종료하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