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잠기는 소리. 지금은 밤이다. 모두가 잠들어 있다. 무거워진 방광을 이끌고 화장실로 간다. 시원하게 물줄기를 내보내다 말고 남자는 멈칫거린다. 물을 내리려던 손을 멈추고 팔을 허공에 정지시킨다.
‘저기, 저, 저것이 무엇인고.’
어두운 밤이었다. 누군가를 깨워서 자신의 노폐물을 함께 구경하자고 권하기엔 좀 뭣했을 시간이다. 아내는 잠을 설치다가 겨우 잠들었다. 그런 아내를 다시 불러내기에도 꽤 멋쩍은 시간. 지금은 어제저녁에서 꽤나 멀어진 시간이고, 다음 날 아침이 오기에는 꽤나 이른 시간이다. 그날, 이 남자는 덜컥, 내려앉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노란 액체 사이로 붉게 퍼지는 걸쩍지근한 노폐물을 바라다본다.
쏴아아아. 내려가는 변기 소리에 박자를 맞추며 조금 붉어진 물방울들이 하강을 한다. 지하의 세계 저 밑으로 밑으로 그 이름 모를 것들이 블랙홀에 빨려 들 듯 흰 변기 속으로 순식간에 달아난다.
“동네 병원에라도 가 봐야지 뭐.”
며칠 후, 남자는 대수롭지 않은 척 특유의 담담한 톤으로 상대를 안심시킨다. 그리고 제 발로 병원에 찾아가기 위해 채비를 한다. 평소 같으면 멀지 않았을 거리다. 그러나 오늘따라 그 거리가 조금은 길고 조금은 더 어둡다. 어제 이 남자는 위장과 대장의 음식 찌꺼기를 싹 다 비웠다. 모든 걸 다 비우고 난 이후여서인지 남자의 심장은 자꾸만 허기를 느끼며 두근거린다. 이 남자, 그리고 이 남자와 함께 나란히 걷던 한 여자는 자신들이 들어갈 병원을 가만히 올려다본다. 마음의 무게가 짙어지고, 마음의 채도가 갑자기 불투명해진다. 이제 더 이상 젊지만은 않은 이들 부부 한 쌍. 그들은 병원 문 안으로 무거운 걸음을 욱여넣는다. 지금까지 이들은 오래 산 여느 부부들처럼 늘 내외하며 걸어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같은 마음으로 두 손을 꼭 잡는다.
“보호자 분, 여기 와 보세요!”
남자가 내시경을 하러 들어간 후, 흰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이 여자를 부른다. 다소 큰 소리로 다급히 그녀를 부른다. 왜 하필 내시경을 하다 말고서.
덜커덩
남자가 들어간 문이 다시 덜커덩 더 세게 잠기는 소리인지, 겁이 난 여자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소리인지. 부부는 시간 차를 두고서 이렇게 덜커덩 소리를 서로 나누어 갖는다. 수십 년을 함께 덜컹거려 온 그 소리를, 오늘은 이 병원에서 따로 또 같이 듣는다.
동네 내시경 병원에서
동네, 내시경 전문 병원에서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았습니다.
눈깔사탕 크기의 혹 덩어리 두 개를 도려냈습니다.
질이 나쁜 혹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몇 년 지나면 나쁜 놈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사전 검사를 통해 혹을 제거해, 아주 다행이라고 의사는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침대에서 바퀴벌레가 나올 것 같은 음산한 병실에서, 지혈제를 탄 링거액 주삿바늘을 손등에 꽂고, 밤을 새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식(禁食)입니다.
어제 오후 집에서부터 시작된 금식입니다. 설사약을 먹고, 4리터 넘게 물을 마시고……. 내시경 검사 전에 한 톨의 음식찌꺼기라도 위와 장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고……. 화장실을 열 번도 더 들락날락했습니다.
혹시라도 대장에 문제가 생겨 고생을 한다면,
멍청한 놈이라고, 빈축(嚬蹙)을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즈음처럼 의학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세상에, 사전 검사를 통해 충분히 예방을 할 수 있는데, 검사를 게을리 해 고생을 한다면, 멍청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듯합니다. 그냥 혼자서 하는 소리입니다.
만날 남의 항문만 들여다봐야 하는, 친절한 의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왔습니다.
2011. 10. 14.
“뭐 먹을 거 없어?”
“아직은 안 된다잖아요.”
이제 막 ‘환자 아닌 사람’이 된 아버지가 먹을 것을 재촉한다. 우리는 아버지의 위장을 걱정하며 아직 때가 되지 아니하였다고 만류한다. 이번 걱정은 지난밤의 걱정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걱정이다. 배가 아프다는 게 아니라 ‘배가 고프다’이다. 위장과 대장의 아우성과 농성이 소란스럽게 아버지의 참을성을 시험한다. 그때, 아버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누군가가 우리에게 음식 향기를 퍼뜨린다. 옆 침대 보호자가 옆 사람의 허기는 아랑곳 않고 솔솔 반찬 냄새를 흘린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고 응당 먹어야 할 사람은 먹어야 한다는 듯이 옆 환자는 제 몫의 밥을 꾸역꾸역 먹고 있다.
“아직도 시간 안 됐어? 어? 의사한테 좀 물어봐 봐.”
이만하길 다행이다, 얼마나 좋냐, 걱정했는데 잘 되었다, 이 병원은 청소를 좀 해야겠네, 시트가 이게 뭐냐 등등 우리 모녀는 다른 주제로 대화를 돌리고 돌리려 한다. 그러나 아무리 애쓰고 애써도 다시 돌고 돌아 아버지는 ‘먹을 것’에 대한 본능으로 되돌아가 꼭 거기 그 자리에서 똑같은 화두, ‘배고파’를 꺼내신다.
이럴 땐 꼭 아버지 안에 숨어 있던 귀여운 소년 하나가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것만 같다. 소년이 미래의 자기 아내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이 들어 버린 자신의 딸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떼를 쓴다. 나는 그 소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준다. 소년이 딸의 손길에 잠자코 앉아 식사를 기다린다. 그러나 어느새 다시 또 고개를 휙 돌리고서는,
“잉, 배고파. 누나, 나 언제까지 굶어야 해?”
칠십이 넘은 목소리로 어린 소년이 내게 말한다. 소년은 자신의 허기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피력해 댄다. 다 늙은 딸은 어린 아버지를 토닥인다.
“언제부터 먹어도 된대? 응응?”
소년의 위장은 먹을거리를 찾아 헤맨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소년인 아버지’를 만난다.
평소와 달리 아이가 된 아버지를 본다. 곧 이 소년은 허기진 위장을 든든히 채우고서 퇴원이라는 절차를 밟을 것이다. 소년의 짧고 굵은 병원 체험기는 이렇게 한낱 에피소드로 막을 내리리라. 그리고 ‘소년인 아버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노년의 아버지’로 돌아와 근엄한 하루를 살아가리라.
문득 그동안 칠십이 넘도록 채워지지 않았을 아버지의 허기들을 헤아려 본다. 아버지가 소년 시절 꾸었던 꿈에 대한 허기, 청년이 되고 세상의 벽에 막혀 뒤돌아서야 했던 허기, 그리고 시간과 세월로는 채워지지 않았을 장년의 허기. 특히 딸은 아버지가 가장이 된 후 포기해야 했던 자기 생에 대한 공복감들을 떠올린다. '가족' 을 메우기 위해 내려놓았던 그 숱한 허기들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아버지의 시간 안에 아직도 쌓여 있을까, 어딘가 세상 밖으로 달아나 버렸을까.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늘 종이 위에 글자를 쓰며 자신의 허기를 달래곤 했다. 글로밖에는 달랠 수 없었던 아버지의 허기를 뒤늦게나마 짐작해 본다. 나이를 먹는 게 나뿐인 줄 알았는데 무심결에 돌아다보니 부모님의 나이는 나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전속력을 다해 앞으로 앞으로만 달려간다.
“이제 밥 드셔도 돼요.”
병원의 공식적인 허락이 떨어지고, 아버지의 성장은 곧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아버지는 이제 다시 새로운 몸으로 새 날을 시작한다. 용종을 떼어 낸 가벼워진 몸이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그 안도감이 아버지를 따뜻하게 감싼다. 아버지는 마침내 의사의 허락을 받는다. 아이처럼 웃으며 가벼운 국물로 자기 생을 천천히 다시 시작한다.
노년의 얼굴을 한 소년의 미소가 밥상 앞에서 점점 더 커다래진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와 딸들도 안도의 숨을 쉰다. 안도감이라는 포만감이 우리의 허기까지 꽉 꽉 들어 채운다. 우리 모두는 생에 대한 허기를 달래려고 시장한 위장에 밥 한 숟갈씩을 함께 집어넣는다.
의사에게 일용할 양식을 허락받자마자 온 식구가 숟가락질, 젓가락질로 침묵 중이다. 침묵이 입 안 가득 풍성한 음식으로 퍼지며, 우리의 허기를 마구 채운다. 나는 우리의 침묵이 배 속 허기를, 우리 삶 속 허기를 가득 메우는 그 따뜻한 소리를 듣는다.
아버지 글대로라면 ‘만날 남의 항문만 들여다봐야 하는’ 의사 선생님 덕분에 우리는 오늘도 우리의 밥숟갈을 평소보다 더 맛있게 입에 욱여넣는다. 지금 이 순간은 무엇을 먹더라도 뭐든지 맛있다.살아가며 어떤 맛없는 반찬이 내 상차림에 놓이더라도 오늘의, 지금의 이 밥숟갈을 기억하고 싶다. 온 가족이 다 함께 웃는 지금의 이 밥숟갈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