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책장봄먼지 Oct 26. 2019

셋이 합쳐 우당탕탕 평균 연령 예순둘

사람이 좀 멍청해졌습니다


우당탕탕탕타라탕     


까딱 잘못했으면 정말 내 엉덩이는 큰일을 치를 뻔하였다. 방금 나는 180°로 다리를 찢는 리듬체조 혹은 기계체조 선수 같았다. 찢어지는 고통 사이로 내 비명이 혼잡하게 목욕탕을 가득 메운다. 멍하니 정신을 차린 내 엉덩이는 곁에 있는 욕조를 짚으며 천천히 사위를 살핀다. 순발력을 발휘하려던 몸통과 팔다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나는 엉덩방아를 찧는다. 내 엉덩이와 함께 넘어진 세숫대야, 양치 컵, 비누 따위가 조금 전 나의 고군분투가 정말로 험난했음을 보여 준다. 폐허가 된 목욕탕을 보니 부모님이 이 소리를 듣고 문밖에서 꽤 놀라셨을 것 같다.      


Pixabay


나는 욕실 실내화를 얼른 벗어 두고 문을 연다. 어서 화장실 밖으로 나가 놀란 내 심정을 공유해야겠다.    

 “엄니, 아부지 방금 들으셨지? 완전 나도 깜놀했다니까요.”

 “응? 왜?”

 “못 들으셨어?”

 “어. 뭔 소리? 전혀 안 들렸는데? 뭔 일 있었어?”     



아버지는 조금 전까지 손자들 도시락을 씻으셨다. 그러고 나서 거실 소파로 가 당신 취향에 맞는 TV 프로그램을 찾아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리고 계셨다. 화장실 밖으로 나와 내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아버지와 함께 안도의 숨을 내쉬려던 나, 이번엔 부엌으로 시선을 돌린다. 부엌에서는 엄마의 소리가 난다. 국 끓는 소리, 멸치가 들들 볶이고 있는 소리, 프라이팬이 나가고 들어가 탕탕탕 소리.     


Pixabay


 “무슨 일인데?”

 엄마가 심드렁하게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나, 화장실에서 방금 넘어졌었어. 엄마, 못 들으셨어? 정말 크게 소리 났었는데!”

 “어, 그래? 전혀 안 들렸는데?”     


우리 집은 서로의 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대저택이 아니다, 결코. 우리 집 화장실에서 거실이나 부엌은 매우 가까운 거리, 곧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다. 문 하나가 가로막혀 있을 뿐인데 나의 ‘우당탕탕’이 그렇게나 ‘전혀’ 안 들렸다니, 위로를 받으려던 나는 괜히 머쓱해진다. 사실 드라마를 볼 때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자주 일어나곤 한다.      

    


아버지가 내게 묻는다.

 “쟤가 방금 뭐랬어?”

 “아, ‘생각해 보고 나서 나한테 빠른 시일 내에 답을 주면 좋겠다’라고 말했어요.”

 “근데 쟨 누구야? 저기 저 오른쪽에 있는 사람. 남자 친구래?”

 “아니요, 아니요. 저 사람은 주인공 삼촌으로 나오는 사람이에요. 저번에도 내가 말했었는데.”

 “(그러다 한참 드라마를 보시다 말고) 그런데 저 사람은 또 누구냐? 혹시 아까 그 삼촌인가?”

 “(아하, 또 왜 그러십니까. 아버지, 저랑 지금까지 드라마 쭉 같이 보시고 계셨잖아유.) 저 사람은 삼촌 아니고 다른 남자 주인공입니다요.”     





콧등에 돋보기를  

   

콧등에 돋보기를 걸쳐야만 신문을 대충 읽을 수 있습니다. 시력이 점점 약해져 갑니다.

노안(老眼)입니다.

이제는 멀리 보지 않아도 된다는,

남은 세월이 그렇게 길지 않다는,

남은 세상을 보는 데는 그 정도의 시력으로도 별 문제가 없다는,

자연의 순리는 누구도 비켜 갈 수 없다는…….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보청기를 낄 정도는 아닙니다만, 귀가 먹어갑니다.

사람이 좀 멍청해졌습니다.

청력이 약해졌습니다. 두 번, 세 번 말을 해야 집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때가 있습니다.

집사람이 답답하다고 가슴을 칩니다. 나도 답답합니다.

어쩌면, 이제는 모든 소리를 다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다는,

귀에 걸리는 말만 골라 들으라는,

시공(時空)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2012. 7. 12.     



시력도 청력도 기력도 조금씩 조금씩 빠져나간다. 풍선에서 바람이 푸시시 빠져나가듯, 정해진 수명에서 세월이 조금씩 빠져나가듯, 무언가가 시나브로, 눈치채지 못할 만큼만 사라져 간다.


남자는 느지막이 둘째 딸에게서 쌍둥이 손자들을 얻었다. 남자는 눈이 가끔 끔쩍할 때면 일회용 눈물을 넣었고, 할아버지가 된 후 쌍둥이 두 손자의 이름을 종종 뒤바꿔 불렀다. 그놈이 그놈 같다는 게 그 남자의 주장이었다. 쌍둥이 손자들이 같은 옷을 입을 때면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첫째에게 가서 둘째 이름을 부르고, 둘째에게 가서 첫째 이름을 불렀다. 가족들에게서 ‘걔가 걔가 아니에요.’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이 남자, 이제는 무언가를 보는 속도도, 무언가를 듣는 속도도, 산책길을 걷는 걸음의 속도도 자꾸만 뒤로 처진다. 조금씩 무언가가 뒤로 밀려나고, 뒤쪽으로 빠져나간다.      



한때 그는 젊었다. 물론 더 한때는 ‘매우’ 젊었다. 지금의 딸보다도 훨씬 더 젊고 ‘한창’ 일 때가 분명 있었다.      




“안 다쳤으니 다행이네.”

 부모님은 ‘못 들었다’는 핑계를 대며 나에 대한 걱정을 부풀리지 않으신다. ‘네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면 당장에 너를 걱정했을 것이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신다. ‘어쨌든 안 다쳤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닌감?’이라고도 말씀하신다.

 그래, 부모님 말씀이 옳을지도 모른다. 안 다쳤으면, 그래 그럼 그걸로 된 거다. 우리 집에서 시집도 못 가 보고 엉덩방아를 찧은 마흔 딸내미의 ‘우당탕탕 목욕 분투기’는 그리 큰 관심사가 아니다.     




 사람이 좀 멍청해졌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의 책에 대고 자신이 ‘귀가 먹었고, 사람이 좀 멍청해졌다’고 쓰셨다. 하지만 조금은 멍청해져도 살 만할지 모른다. 너무 똑똑하면 자신의 ‘나이 듦’도, 자꾸만 깜빡깜빡하는 기억력도 용서하기 힘들 것이다. 사람이 좀 멍청해야 나이 드는 데 무뎌지고 세상도 살 만하리라.


아버지는 자신의 글에 ‘귀가 먹어간다’라고 기록하셨다. 그러나 정말로 귀가 멀어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살아온 시간이 많아 여기저기 다른 것들에 눈을 돌리고 귀를 돌리며 사는 일이 고단하셨을 수도 있다. 내 아버지, 좋은 것은 듣고 나쁜 것에는 귀를 잠시 닫아 둔다. 아니, 나쁜 것이 와도 그저 무심히 노안의 눈으로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리신다.      


나도 아버지를 따라 귀를 닫아 본다. 세상이 주는 모든 소리를 모조리 귀담아듣고 꼭 실천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던 또 어느 날.     

 우당탕탕탕탕탕탕.


 이번에도 범인은 나다. 내 몸도 자꾸만 멍청해지는 것인지 또 한 번 목욕탕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삐끗한다. 다행히 이번에는 넘어지는 것만모면한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뭔 소리냐. 괜찮냐.’라고 묻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화장실 문밖에서 들린다.      

"다행히 괜찮습니다요." 

지난번 ‘우당탕탕’이 가르쳐 준 학습의 효과인지 이번엔 아버지가 귀를 열어 두셨다.     


'그래, 진짜 다행이야.'


그래, 아직 다행이다. 내가 부모님보다 조금 더 젊어서, 목욕탕에서 미끄러지는 사람이 부모님이 아니라, 한 살이라도 더 어린 나여서 다행이다. 동생이 시집가고 난 이 집에서 나이로는 내가 제일 막내여서 그것도 참말 다행이다. 이 집에 사는 우리 집 세 식구, 셋이 합해 평균 연령 예순두 살. 점점 늘어가는 우리 가족의 평균 연령. 그 속도에 맞춰 아버지와 딸이 보조를 맞추며 경쟁하듯 점점 더 멍청해지고 있다. 그래, 그것도 참 다행이다.           


멍청하다는 아버지와 더 멍청해지고 있는 딸이 이렇게 어깨동무를 하며 살아간다.
서로 나이 들고 서로 멍청해져 가는 모습을 ‘좋~다’고 바라보며 웃고 또 웃는다.
세상 가장 멍청한 부녀가 오늘도 서로의 손을 맞잡는다.
그래, 그것 참 다행이다.     



이전 05화 나이라는 도둑이 앗아간 허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