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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Oct 09. 2019

아버지라는 습관

그 65만 시간의 나잇값

나잇값 좀 하고 살아.     


여기, 초등학생 취급을 받는 한 남자가 있다. 자신의 나잇값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 남자.


“여기는 초록불이에요. 건너세요. 여기는 빨간불이에요. 건너면 안 돼요.”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이 남자는 일일이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 줘야 한단다. 이 남자는 양복 덮개를 사 오라면 세탁망을 사 오고, 싱싱한 귤을 사 오라면 시들기 직전의 귤을 사 오곤 한다. 김장 담그기 조수로 섭외했어도 멸치액젓을 찔끔 부어 주다 말고 어느새 슬쩍 TV 앞으로 가 버린다.


이것 좀 사 오라면 저것을 사 오고, 저것 좀 해 달라면, 이것을 하는 막내아들.      


내 어머니는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이 막내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세상에서 제 구실을 하게 만드느라 여간 애쓰시는 게 아니다. (게다가 내 어미의 막내아들 같은 이 양반은 사실 일흔을 훌쩍 넘긴 양반이다.)

 




“당신은 평생 책만 읽고 과거도 보러 가지 않으니 도대체 어찌하려고 그러시오?”

 허생이 웃으며 말했다.

“아직 공부가 미숙하여 그렇소.”

 아내는 다시 반론하였다.

“그러면 생필품을 만드는 기술자나 되시오.”

“그건 배우지 못했으니 어떻게 한단 말이오.”

 그러자 아내가 화를 내며 말했다.

“밤낮 책만 읽어서 무엇에 쓴단 말이오. 기술도 없고 장사도 못할 바엔 차라리 도둑질이나 하시오.”

허생은 마침내 읽던 책을 덮어 버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애석하지만 어쩔 수 없구나. 그동안 꼭 십 년을 목표로 책을 읽으려고 했는데 지금까지 칠 년밖에 못 했으니 말이다.”

연암 박지원 선생의 <허생전> 중     




사실 그 막내아들은 장성하여서도 집 안에 틀어박혀 책 읽기에만 몰두하고 자신의 ‘사람값’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이’라는 것은 저절로 먹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것을 잘 몰랐다.  그 남자는 자신의 나잇값을 잊고 허생처럼 종종 책 속에 들어가곤 했으며, 타인에게 보여 주지 않는 시나 산문을, 소일거리 삼아 몇 편씩 쓰기도 하였다.


시대가 가파르게 자신의 나이를 먹어가는 동안 그 남자는 매우 천천히 그 시대를 뒤따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조금쯤 뒤로 뒤로 밀려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의 나잇값은 갈 길이 멀어 보였다.




잃어버린 고향이 있습니다



당신은 나그네가 아니지요-

시는 시인이 써야 합니다.     

떠돌이 길손입니다.

잃어버린 고향이 있습니다.

어느 동자승의 말이, 그 길로 가면 잃어버린 고향을 갈 수 있다고 해서 가고 있습니다.     

혹여, 시 몇 수를 읊고서 나그네 행세를 하는 것은 아닌지, 노파심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그 동자승의 말이,

세월도 물고기처럼 낚시에 걸려 올라올 때가 있다고 하는군요.


세월 낚는 법을 익히고 있습니다.

그렇게 무심(無心)히 세월을 낚다 보면,

나를 낚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세월을 낚던 그 남자는 사실 나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길고 긴 시간을 들여 사람값을 하기 위해 ‘아버지’라는 습관을 들였다. 나잇값은 못 했을지 몰라도 ‘아버지’라는 몫을 해내기 위해 바동거렸다. 한 개의 습관을 들이는 데 최소 ‘21일’이 걸린다고 했다. ‘아버지’라는 습관은 21일이 아니라 21년이 걸려서도 제대로 들이기 어려운 습관이었다. 아마 ‘아버지’라는 습관은 자신의 ‘사람값’을 모조리, 통째 내어놓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먹을 것은 저절로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도 점점 ‘사람값’에 목을 매었다.
이제 더는 ‘시를 쓰는 나그네’ 흉내를 내지 않았다.      



나이를 제대로 찾으려면 그 나이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세상은 말한다. 사십. 사십의 여자라면 꾸준히 해 온 자기만의 일 하나에, 토끼같이 귀여운 자식, 듬직한 데다가 돈도 꽤 잘 벌며, 어느 정도 기반을 잡고 있는 남편 하나쯤은 있어야 한단다.


칠십. 칠십이면 자신이 해 온 일에 대한 자기 명성 하나쯤은 있어야 하고, 먹고살고 남을 만큼의 넉넉한 노후 생활도 꽤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나이 칠십에 누리는 호사여야 한다고 세상은 말하곤 한다.


아버지도 나도 세상이 말하는 ‘나이’의 기준에는 함량 미달이다. 나는 ‘맏딸’의 습관을 제대로 들이지 못했고, 아버지도 ‘아버지’라는 습관을 꼼꼼히 들이기는 힘들었다. (그게 개인 탓인지 세상 탓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세상 탓인 걸로 해 두자.)


하지만 아버지는 나와는 조금 달랐다. 아버지는 ‘나’라는 딸의 아버지가 되는 일을 굳이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버지 값’을 하려고 지금까지도 딸내미 대신 무거운 짐을  나르고 딸내미 대신 아내의 심부름을 하고, 딸내미 귀갓길에는 묵묵히 마중을 나온다.     

 


하다 보니 아버지가 되었다. 그리고 먹다 보니 우리 아버지, 일흔을  넘어 머잖아 ‘여든의 아버지’가 다. ‘여든의 아버지’가 되는 일은 쉽지 않은 습관을 들여야 하는 일이다. 사람의 뜻으로 만들 수 있는 습관이 아니다. 세월의 힘이 필요하고 사람의 인내가 필요하다. 아버지가 되는 일', 그 일을 지금 우리 아버지,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기어이’ 해내고 있다.


반면 덜컥 자연스럽게 딸들이 되어 버린 우리는 그 사실을 종종 잊는다.


나 역시 죄송하게도
저절로 ‘아버지의 딸’이 되었다.
아무 노력도 들이지 않고서 ‘딸’이라는 습관을 들였다.


아버지가 애써 습관을 들여 아버지가 된 것과 달리 나는 거저 아버지의 딸이 되었다.  오늘도 나의 아버지는 원래부터 아버지였던 것처럼, 딸이 태어나던 해부터 지금까지도 늘 ‘아버지’로 살고 있다.


‘딸’이 되는 것도 제대로 된 습관이, 어쩌면 치열한 공부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머리를 질끈 묶고서 다시 '아버지'라는 문제집을 펼쳐야겠다.

아니 어쩌면 진짜 딸이 되는 습관은 사지선다형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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