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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Aug 14. 2019

그 노인네 아직도 살아 있나

살아서 이 꼴 저 꼴

“어머어머어머, 그 연예인 있잖아요, 이 아무개 말이에요. 알죠, 아부지?”

“왜? 죽었대?”

“아이, 아부지, 그게 아니라!”     

 

“그 TV에도 자주 나오고 했던 그 사람 있잖아요. 왜, 그제도 우리 같이 드라마에서 봤었던, 그 사람!”

“왜왜? 죽었대?”

 “에이이, 아니 엄마, 그게 아니고!”     


 나는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호들갑을 떨며 다른 이의 소식을 전할 때가 있다. 나의 호들갑이 도가 지나쳐서인지 엄마나 아버지의 반응이 가끔 격할 때가 있다.     



죽었대?     



 나의 그분들이 아무렇지 않게 금기의 단어, ‘죽음’을 꺼내 들 때, 나는 자식이면서도 부모님에게 크게 나무라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왜 멀쩡한 사람을 죽여요?’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부모님은 절대 무안한 표정을 짓지 아니하신다. ‘그럴 수도 있지, 뭐.’라는 덤덤한 표정. ‘죽음’이라는 시계가 되도록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기를 바라기에 나는 발음조차 하기 싫은 단어가 바로 ‘죽음’이다. 하지만 부모님은 심드렁하게 ‘삶’과 ‘죽음’을 가까운 곳에 끌어다 놓고 이를 이어 붙이신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마치 ‘띄어쓰기’라는 간격이 결코 필요 없다는 듯이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급하게 울리는 전화가 식구들의 밤잠을 깨운다.

누구세요? 어? 누구요? 누구?

하지만 한밤중에 전화가 걸려오면 부모님도 나처럼 크게 호들갑을 떠신다. 그 전화는 때론 잘못 걸린 전화이기도 하고, 때로는 울리다 그치는 전화이기도 하다.

 ‘뚜뚜뚜뚜…….’

 이번에 걸려온 한밤중의 전화는 다행히 식구들을 놀라게 하지 아니하고 잠잠히 사그라든다. 오늘 밤, 부모님이 호들갑을 떨며 놀라실 일은 더는 없다. 부모님도 나도 하품을 하며 다시 각자의 잠자리로 되돌아간다.


 이제 부모님 인생에 남은 ‘호들갑’이란 간밤에 ‘안녕하신지’, 혹은 ‘안녕하지 못 하신지’에 관한 일이다. 친구들 모임에 나가서도 ‘내가 먼저 가야지’, ‘안 되네. 내가 먼저 가야지’라는 농담을 서로 주고받으시며, ‘마지막으로 남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되는 사태를 한사코 사양하려 드신다.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자신의 주변에서 한 사람씩 사라진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들도 같이 땅 속에 묻혀 버린다. 젊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한밤중 전화’는 ‘술 취한 옛 애인의 전화’ 같은 낭만적인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제 더 이상 술 취한 애인이 없는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한밤중 전화’는 ‘삶과 죽음에게서 걸려오는 다소 무겁고 진중한 전화’다.      




노인들의 대화


그 노인네 아직도 살아 있나-

그 노인네도 죽어야 세상을 볼 텐데-

그러게 말이여-

산다는 게 죄여-     

한 세월,

칠십 평생,

그 길, 뒤돌아보면,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마음이 아팠을까.     



 오늘도 나는 아버지의 책장을 넘긴다. 오늘 펼쳐 본 아버지의 책장에는 ‘노인들의 대화’가 담겨 있다. 이 시 속의 노인들은 ‘죽어야 세상을 볼 텐데’라고 말한다. 죽기 전에는 제대로 된 세상을 보지 못한다는 뜻일까.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이 글을 쓰신 걸까. 사는 동안 충분히 세상을 누리고 싶은 나는 이런 말들이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그런데 여기 ‘산다는 것’, 특히나 ‘오래 산다는 것이 결코 죄가 아님’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라는 소설에는 ‘황혼의 반란’이라는 단편이 있다. 이 소설에서는 ‘노년기와 극노년기의 국민들이 생산을 하지 않고 소비만 함으로써 다른 이들로 하여금 세금을 내게 하고, 사회에는 퇴보의 이미지를 안겨 준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황혼의 반란’에서 노인들은 나이가 들면 'CDPD', 즉 ‘휴식·평화·안락 센터(Centre de Détente Paix et Douceur)’로 간다. 소문에 의하면, 이 행정 기관이 강제로 노인들을 데려가 독극물 주사를 놓는다고도 한다. 주인공들은 끌려가던 도중 센터 버스에서 탈출을 감행하고, 그들은 사회와 떨어져 숲 속에 머물게 된다.

 이 소설 속에서 사회는 모든 경제 문제를 ‘노인 증가’와 연결하려 든다. 광고 제작자들은 ‘반노(反老)’ 캠페인을 벌이며 노인을 비하하고 배척한다.



 “우리를 존중해 주십시오. 사랑해 주십시오. …… 노인들은 아기들을 돌볼 수 있고 뜨개질을 할 수 있습니다. …… 시간이 많이 걸려서 젊은이들이 싫어하는 모든 일을 우리는 아직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책 속에서는 ‘산다’는 것이 죄가 된다. 특히 ‘노인’이 오래오래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에 커다란 짐을 안기는 범죄 행위로까지 치부된다. 나이를 한 해 두 해 더 먹을수록 노인은, 아니 우리 모두는 그렇게 ‘나이’라는 죄를 쌓아 간다.      




 다시 나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와 본다. 그럼, 나의 아버지는 살면서 어떤 죄를 지으셨을까. 어떤 죄가 그리 많아 우리 아버지는 자신의 글에서조차 ‘산다는 것이 죄’이고, ‘죽어야 세상을 본다.’라고 말씀하시는 걸까.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이른 나이에 퇴직을 한 게 죄인 걸까? 하필 자식 밑으로 들어갈 돈이 절절히 필요한 그때, 좀 더 버티지 아니하고 회사를 나와 버린 게 죄인 걸까? 골방에 틀어박혀 온종일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잠시 집안에 다소 무심했던 그 시간들이 죄인 걸까?

 


 하지만 딸로서 감히 말하건대, 나의 아버지는 더 이상 ‘죄가 없어도 된다.’ 아버지는 벌써 일흔 해를 넘기며 살아오고 계시다. 그 시간 동안 끈질기게 생(生)을 버텨 오셨으므로 설령 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면죄부를 주어야 할 나이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 딸이 주는 이 면죄부를 받고 나면, 다시금 새로운 마음, 새로운 뜻으로 다시 한번 가벼이 이 세상에 ‘죄를 지으셨으면’ 좋겠다. 산다는 것이, 나이 들어간다는 그것이 만일 정말 큰 죄를 짓는 일이라면, 나의 아버지가 그 죄를 쭉 이어 나가시길 바란다.


 왜냐하면 아버지 말씀대로라면, ‘삶’은 죄이고, 그 ‘삶’이라는 죄를 지으려면,     

우선 당장은 살아 있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살아서 이 꼴 저 꼴을 다 보고,
개똥밭에 구르기도 하면서
나의 아버지는 건강히 살아 있어야 한다




 ‘그 노인네, 죽어야 세상을 볼 텐데’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 살아서도 세상을 보며, 대단하지 않아도 좋으니, 마음 편히, 지금 이대로만 살아가 주셨으면 좋겠다.     


 나도 이제 되도록 아버지를 닮으려 한다. 아버지처럼 ‘삶’이라는 죄를 잘 짓고 싶다. 늙을 때까지, 늙어 죽을 때까지 ‘사는 것처럼 살기’로 마음먹고 싶다. 뭐든 살아 있어야 한다. 살아서 쓴 맛, 단 맛을 맛보아야 한다. 삶’ 옆에 바싹 ‘붙여쓰기’ 되어 있는 마지막 그 ‘죽음’이란 글자가 우리를 찾아오기 직전까지 나는, 아버지는,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정말 사는 것처럼 죄를 지으며 부디 잘 살아 있어야' 한다.      


 산다는 건 죄여   



 아버지와 딸, 그래서 오늘도 ‘살아간다’는 죄를 지으며 별 볼 일 없는 하루를 경건히 살아 내 본다. 사는 게 죄일지라도 ‘일단 살아 있는 한’, 지금껏 살아온 세월이 아까워서라도 우리 부녀, 계속해서 이 생(生)을 ‘은근히’ 잘 살아내기로 한다.


산다는 건 어쩌면 죄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면 혹, 산다는 건 정말 아름다운 죄일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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