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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Nov 08. 2019

오물오물 씹어 먹는 아버지의 온기

씹고 뜯고 맛보는 날

“늦었어, 엄마.”


내 귀에만 울리지 않던 시계 소리가 오늘은 엄마의 귀에도 똑같은 반응을 일으켰나 보다. 허둥지둥하는 엄마의 등에 대고 ‘안녕히 주무셨어요’하고 말해 보려 하지만, 이내 잠 속에 그 말이 삭혀 든다. 연신 하품을 해대며 교복을 입고 식탁 의자에 앉는다. 헝클어진 머리를 애써 빗어 주시는 엄마께, 난 늦게 일어난 것을 원망하며 말한다.


 “밥 먹을 때 머리 빗으면 소화 안 되니까 이따 빗어 줘.”


내가 생각해도 당돌하다. ‘이게 딸자식을 키운 보람인가.’ 난 엄마의 그 표정을 읽고도 모른 척한다.

“도시락은 어딨어?” 나는 또 내 목소리에 짜증을 묻혔다. 나는 생각한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내가 왜 이럴까.’


‘예전엔 안 그랬는데, 내가 왜 이럴까.’


터벅터벅 집을 나왔다. 내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괜스레 엄마를 깨우지 못한 시계를 원망해 본다. 계단을 내려와 돌아서려 했을 때 현관문을 빼꼼 열고 잘 가라시며 내 눈을 바라보셨던 엄마와 아빠의 눈이 생각난다. 그 눈이 내 눈을 떠나지 않는다.


학교로 오는 버스에서도 난 줄곧 부모님 생각뿐이다. 말없이 도시락을 내 책상 위에 올려 주셨던 아버지의 두툼한 손이 생각난다. 아버지의 손은 어머니의 눈과 다시 한데로 뭉쳐져 내 가슴으로 파고든다. 그래서 그런가, 가슴이 또 한 번 시려 옴을 느낀다.


점심시간이 되어 도시락을 꺼낸다. 수업 시간 동안 잊었던 엄마와 아버지의 얼굴이 도시락 주머니에 담겨 있어 차마 깨물지 못하겠다. 반찬 하나를 우물거릴 때마다 그분들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는 것만 같다. 10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아침에 나갔던 모양으로 터덜터덜 돌아온다.


"아빠! 엄마!"


내 지친 발걸음을 반갑게 맞이하는 엄마의 눈에서, 아버지의 손에서, 난 스며 나오는 온정을 느낀다. 내 지친 마음을 눈으로 어루만지시고 손으로 쓰다듬어 주신다. 난 이렇게 내 멍에 얹혔던 잘못을 엄마와 아버지의 사랑으로 뉘우친다. (……)


 

내가 제일 소중히 여기는 건 그런 온기인 듯하다. 내가 힘들 때마다 내 등을 두드려 주시던 아버지, 어머니의 온기가 그러하고, 지친 발걸음에 숨을 불어 주시던 어머니, 아버지의 온기가 그러하다. 눈가에 진 주름과 거칠어진 손에서 따뜻하게 피어나는 그것의 힘으로 나는 계속 이곳을 지켜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가끔씩 문을 닫고 내 세계로만 들어가려 할 때 그 온기는 문틈으로 들어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어느 날 내게로 날아온 아버지의 편지는 실로 나를 일깨우고 일으켰다.


“사랑하는 훈민아, 살아가다 힘든 일이 생기더라고 그걸 삶의 전부라고 여기지 말고 하루하루를 사랑하거라.”


아버지의 온기는 내게 의욕을 주시고 용기를 주신다. 아버지의 온기는 내 마음의 문을 열게 하신다. 그것을 난 알지도 못하고 늘 온기를 식혀 버리곤 했다. 내 가슴이 아리는 것보다 훨씬 더 어머니와 아버지의 가슴을 아리게만 했던 거다.


이제는 내게 소중한 것을 사랑해야겠다. 사는 동안 아무리 당연한 온기라 느껴도 그 온기를 진실로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지 않는 이상 온기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내 등교하는 뒷모습에 나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그분들의 온기가 비치지 않았다면 난 어둡고 차가운 곳에서 지친 원망만을 떠들어 대고 있을 거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온기를 난 사랑으로 보답해 드리고 싶다.

내가 그분들을 사랑하는 까닭이다.     






오늘은 나의 책장을 넘긴다. 오랜만에 아버지 글이 아닌 고등학교 때 쓴 나의 글을 읽는다. 학교 교지 228쪽에는 ‘학생 문원’이라는 구역에 ‘아직도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오른쪽 위에 아주 조그맣게 내 이름이 적혀 있다. 아버지께 자랑을 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 그래도 교지에 실린 글인데... 아버지는 이 글을 읽고 ‘잘 썼다’라는 말 대신 ‘글의 주제가 좀 미약하고 문단 사이에 통일성이 없다.’라고 냉철하게 내 글에 삼엄한 인사를 건네셨다. 그리고 ‘상을 줄 정도는 아닌데 선생님들이 그렇게 정했으니, 뭐’라는 살뜰한 말도 아끼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이렇게 36.5℃를 지킬 줄 아는 분이시다.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한다지만 고래도 개별 성격과 성향을 고려해 가며 칭찬을 해야 한다. 되도록 ‘우쭈쭈’를 하는 부모님들도 많겠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기준을 지키셨다. 나는 자그마한 일에도 심하게 보챌 때가 많으며, 커다란 기쁨에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박장대소를 한다. 극단적으로 곡예를 해대는 내 감정 기복 그래프를, 아버지는 이미 잘 알고 계셨던 듯하다.     




그래서일까. 아버지가 적절히 뿜어내는 냉철한 공기 덕에 나는 내게 모여든 나쁜 공기를 아무것도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너무 길고 오랜 실패였던 임용고사 생활 때도 그러했고, 구하기 힘든 ‘좋은 직장’이라는 허울에 허덕이며 이력서만 써 대고 있을 때도 그러했으며, ‘나쁜 직장’이라는 덫에 걸려 허우적대다 겨우 빠져나왔을 때도 그러했다.


     

그럴 때도 있어.



아버지는 세상에서 다친 나를 위해 호들갑을 떨지 않으시고 가만히 굵직한 한 문장을 건네신다. 나는 안다. 이 굵은 한 문장이 실은 아버지가 고르고 고른 한마디라는 것을. 이것이 아버지가 내게 안겨 주시는 최대의 온기임을, 나는 기어코 안다.     



"돈을 버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게다가 가던 중 제일 많이 버니까 넘 좋아요. 엄마 아부지한테 용돈도 드리고 조카들 선물도 막 사 주고.”

 “그래도 아껴 써라.”

 “이래 본 적이 없어서 넘 신나요!”

 서른아홉의 뒤늦은 취직을 두고 나는 조금 흥분하고 있었다. 아이처럼 신나 하는 나를 보며 아버지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전보다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은 일이지.”



아버지가 이번에도 격한 리액션 대신 조용히 내 마음에 문장 하나를 얹으신다. 그 옛날 내 고등학교 시절, 내 책상 위에 조용히 도시락을 올려 주시던 그 손길, 그때의 온도 그대로다. 나는 아버지가 ‘뿜뿜’ 내뿜으시는 36.5도의 그 온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사실 나는 ‘별다른 것’들만을 소중히 여기면서 살아왔다. 가령 번듯한 직장과 번듯한 월급, 번듯한 차림새, 번듯한 꿈. 하지만 그러한 번듯함들이 번듯한 나를 만들어 주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적어도 아버지에게는 세상이 말하는 ‘번듯한 가치’들이 달랐다. 아버지는 낡은 외투로도 주눅 들지 않으셨고, 들려오는 ‘이웃집 잘난 남편의 노후 대책’에도 흔들리지 않으셨다. 세상에서 숫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지만 숫자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셨다. 그것이 때로는 상대를 답답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생활력이 약한 모습으로 비쳤을지도 모르겠다. 대책도 비책도 없는 삶으로 힐난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꿋꿋이 휘몰아치는 세상살이, 그 바람 속에서 아버지는 굳게 자신을 지켜 오셨음을 나는 안다.





물론 나는 아버지와 달리 번듯한 가치에 여전히 목을 맨다. 오늘도 나는 아등바등 살아보겠다고 번듯한 삶을 위해 뛰어다닌다. 그렇게 해야 겨우겨우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다고 여긴다. 나의 이 버둥거림이 물론 나쁜 것은 아니다. 사람은 먹고살아야 한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는 길, 잠이 들기 위해 이불을 끌어올리는 시간, 또다시 끌려가듯 시작하는 아침의 시작. 이런 순간순간의 침묵 속에서 나는 분명히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 나는 놓치고 있는 순간들이 어떤 순간인지 몰라 다시 아버지 책장으로 다가간다. 오래 묵은 아버지의 책을 꺼내 든다.






이렇게 내 작은 골방에 처박혀 다시금 아버지의 책을 읽어내려는데 갑자기 밖에서 우리 아버지, 즉 쌍둥이 할아버지를 찾는 소리가 요란하다.      


 하부지, 하부지, 하부지!


손주 하나가 하부지가 된 우리 아버지를 마구 부른다.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저 먼저 달아난다. 이때 할무니가 된 우리 엄마가 똑같은 모양과 똑같은 분량, 똑같은 반찬을 두 개의 식판에 담아 오신다. 하부지는 이 신호에 맞추어 아이들 식탁과 의자를 펼치신다. 여전히 손자들은 하부지, 하부지, 할무니, 할무니, 하며 자기를 따라 달리라고 난리다.


 “밥 먹자!”




 열심히 뛰어다니던 아가들이 그제야 자기 의자에 제 엉덩이를 붙인다. 하부지가 하나, 할무니가 하나씩 도맡는다. 제 스스로 먹을 줄 알면서도 오늘 아가들은 TV 속 부릉부릉 캐릭터에 빠져 숟가락 속도가 느리다. 하부지가 아가 숟가락에 밥을 적당량 푼다. 아가의 입술에 고슬고슬 윤기 나는 밥알을 가져다 댄다. 아가가 입속에 밥숟갈을 쏙 넣고는 오물오물 씹는다. 가시를 발라 놓은 삼치와 조기를 자기 밥 위에 얹어 달라고 ‘치치치’ 거리자 하부지는 삼치를 얹어 다시 아가의 입속으로 밥알을 배달한다. 아가가 조물조물한 손으로 삼치를 움켜쥐고 제 밥 위에 더 보태며 웃는다.


아가들이 할아버지가 배달한 밥알들을 오물오물 씹는다. 아가들은 할무니가 만들어 온 삼치며 된장국이며 감자조림을 제 손으로 장난을 치다가 제 입으로 가져간다.     






이렇게 오물오물 씹어 먹는 아버지의 온기는 대를 이어 전달된다. 옹골지게 받아먹는 쌀밥 한 수저 한 수저에서 아버지의 온기가 지칠 줄 모르고 모락모락 피어난다. 아버지의 밥숟갈이 조카들 입속으로 맛있게 착지하는 것을 본다. 이제야 이 딸내미는 아주 조금쯤 눈치를 챈다. 아버지의 온기가, 어머니의 향기가 나에게 머물러 있을 때라야 그것이 진짜 ‘나’다. 그것들이 내게 배어들고 내가 그것들을 오물오물 잘 씹어 먹고 소화할 때만이 내 삶이 제대로 소화가 되고 그제야 난 튼튼해진다.      


“밥 더 먹을 거야?”


오물오물 그분들이 주신 밥알을 씹어 먹던 나에게도 이런 질문이 날아든다. 그러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넵! 한 그릇 더!


나는 그분들의 소중한 온기를 또다시 한아름 주문한다. 염치없이 언제까지고 리필을 요구하기로 한다.  나는 오늘도 배불리 그분들의 온기를 들이마신다.     


*사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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