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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Nov 01. 2019

누명 쓴 아버지의 손버릇

버릴 건 버려야지

내가 여기 쓰려고 둔 거 누가 버렸어?

어? 내가 방바닥에 둔 영수증 어디 갔지? 누가 가져갔지?

어? 녹화 용량이 있었는데도 녹화가 잘렸는데? 누가 지웠지?


이것은 엄마의 혼잣말 혹은 딸의 혼잣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 ‘누가’는 대체로 우리 아버지일 확률이 매우 높다. 짐짓 아무 일도 없는 척, 아무 말도 못 들은 척 아버지는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으시다. ‘거기 무슨 일 있수? 왜들 호들갑이우?’ 하는 표정으로 한 번쯤 슬쩍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시다 말고는, 당신이 보던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으시거나 TV 리모컨을 돌리며 자신의 시간에만 집중하신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모녀는 아버지에게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아버지는 의심받는 데 익숙하다는 듯 말이 없으시다. 이 의심은 단순한 의심이 아니다. 의심이 명백한 사실로 드러나는 경우도 꽤 많았기에 우리 모녀는 이를 단순히 ‘의심’이라는 말로 가벼이 넘기지 않는 버릇이 있다.     



아버지는 ‘그건 버리면 안 돼요’라고 쓰여 있지 않은 많은 물건들에게 ‘폐기처분’이라는 명령을 내리시는 ‘버리기 대장’이시다. 어머니가 모아 둔 포장지도 쌓이고 쌓인다고 버리시고, 쓰레기인 줄 알았다며 가끔 내 방(‘쓰레기방’이라 불려도 할 말 없는 내 방)에서 아버지 스스로 ‘폐휴지’라 정의 내린 무언가를 버리시기도 한다. 심지어 아버지는 추억도 이따금 버리신다.


아내와 딸자식들만 빼고 죄다 갖다 버릴 심산으로 아버지는 버리고 또 버리신다. 마치 자꾸 비워야 그동안 묵은 세월들이 가뿐해진다는 듯이.





그러던 아버지가 어느 날 또,


-이것 좀 삭제해 주라.

-뭔데요?(우리 아버지, 이번엔 뭘 또 버리시려고?)


지우고 없애고 내다 버리는 삶이 일상이 되신 아버지가 이번에는 또 무엇을 버려 달라고 하시는 걸까? 내 앞에 휴대폰을 내미시는 아버지다.


-이 전화번호부는 어떻게 지우는 거냐?

-왜요?

-지워야 할 사람이야.

 우리 아버지, 전화번호부 속 그 이름을, 그 사람을 버리시려는 건가?

-왜요? 왜 지워요?

-…….  

   

사람들 사이에는 그 관계의 숨이 잦아드는 때가 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런 사람들의 수는 감쪽같이 늘어난다. 인간관계가 단출해지고 홀쭉해질수록 오히려 뿌리는 단단해지고 줄기는 푸르게 윤기를 낸다. 물론 오히려 그 뿌리가 케케묵거나 푸석해지는 경우도 있긴 하다.

 

-그런데 갑자기 왜 지우시게요? 이제 이분이랑 연락 안 하세요?

-전화번호부까지는 들어왔어. 그다음은?

-그다음에 연락처에서 그 사람 이름을 검색하고,

-검색하고?

-검색하고 나서 오른쪽 위에 보시면 점 세 개 세로가 보여요. 거기를 눌러요.

-눌렀어. 그럼?

-거기에 편집, 삭제 등의 글자 보이시죠?

-응. 삭제 눌렀더니 삭제하시겠습니까,라고 또 나오는데?

-네. 확인 누르시면 돼요.


아버지는 확인을 누르시고 조금은 덤덤한 침묵 속에서 ‘삭제’를 감행한다.



     

어느 어부와의 이별

    


그 섬에 와 있습니다.

또 한 사람,

삼인삼색의 입에서도 한두 번쯤 오르내렸던, 그 어부가 세상을 등졌습니다.

지난해 가을, 상조도 돈대봉 탐방 길에 잠깐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었던,

몇 년 전 부인과 사별하고, 섬등포 선창가 오두막에서 홀로 살고 있던 그 어부가, 혼자서 연안 섬으로 바다낚시를 나갔다가 그만 세상을 버렸습니다.

 섬에서 태어나 한평생 어부로 살다가, 바다로 돌아간 어옹(漁翁)과 지금 이별을 하고 있습니다.


-아따, 이 사람아, 걱정하지 마러, 혼자 사는 즐거움도 있어. 이게 인생이여.


 며칠 전, 전화선을 타고 들려온 고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습니다.

 그 섬, 산비탈 양지바른 텃밭에는 유채꽃이 눈이 시리도록 사치스럽게 피어 있었습니다.     



나는 단 한 번 만나고도 연락처를 얼결에 저장했던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 사람들을 웬만하면 지우지 않는다. 그러다 가끔은 SNS를 통해 그들의 육중한 소식들을 뜻하지 않게 만나기도 한다. ‘아하 이 사람, 결혼했구나?’, ‘아! 이 사람, 애를 낳았구나?’,  ‘흠. 이 사람도 지금 나처럼 견디고 있네.’, ‘오, 이분은 개명했네?’ 등등.


나는 그 인연들을 거기 그대로 두곤 한다. 근황을 묻지도 듣지도 않으면서 연락처 삭제를 꺼린다. 그러다 보니 내 전화번호부는 안부를 묻지 않은 사람들로 넘쳐난다.  때로는 이 사람이 누구였지, 스스로 묻곤 한다. 그러나 내 아버지는 나와는 다르시다.


     

-아버지, 근데 이 전화번호부 왜 지워요? 더는 연락 안 하시려고요?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지 뭐.

-못 한다고요?

-간 사람들이야.



문법 시간에 배운 ‘안’과 ‘못’의 부정 부사를 떠올린다. 아버지는 '안 만날 사람들' 말고 '못 만날 사람들'을 천천히 지우시려는 것이다. 아버지 휴대폰에서 방금 삭제된 두 분은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이 생에서 같이 해온 사람들이다. (그분들은 다른 이들보다 먼저 이승에서 자기 번호를 삭제했다. 하늘로 자신의 전화번호부를 옮긴 분들이다.)


죽은 사람에게서 전화벨이 울리는 일은 없다. 그래서 아버지는 오늘 전화번호부 둘을 버리신다. 아버지가 ‘삭제하시겠습니까’에 대한 답으로 ‘확인’을 두 번 택하는 동안 나도 문득 생각에 잠긴다.


 ‘버려야 할 때는 정말 버려야 하는 걸까?’     


아버지는 생에 대한 미련도 오늘 하루에 남기지 않으려고, 비우고 비운다. 더는 찾지 않거나 찾지 못할 인연들도 때가 되면 버리려 하신다. 묶어 두고 쌓아 두는 일을 멀리하신다. 물건도 사람도 버릴 땐 과감히 버리신다. 그게 죽은 자도 산 자도 가벼워지는 일이라는 듯이.  


https://youtu.be/jXHth3TLHkQ








 -아, 또 이거 분명히 아빠가 버렸어! 분명해! 그쵸, 아부지? 엄마, 엄마. 아빠가 또 버렸나 봐!

 

나는 아버지를 쳐다보며 엄마에게 가서 아버지의 손버릇(?)을 고자질한다. 엄마는 내 말에 크게 동조하며 또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이신다.


-당신, 여기 둔 그릇 정말 버렸어요?

-몰라. 그게 뭔데?


모르겠다는 건 버렸다는 뜻인가, 안 버렸다는 뜻인가? 아버지는 이번에 묵비권 대신 모르쇠를 택하신다. 부인

과 딸은 아버지라는 자를 또 의심한다.


-앗. 엄마, 엄마! 아니다, 아니다. 찾았어! 여기 있다! 베란다 바닥 저 구석에 떨어져 있었네.


나는 겸연쩍게 아버지를 돌아다본다.      


아버지, 그나저나 아버지는 왜 누명을 쓰고도 변명을 안 하셔요?    

아버지의 손버릇은 종종 의심을 산다. 그러나 아버지는 별다른 변명의 말이 없으시다.
누명을 쓰고도 당신의 손을, 당신의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으신다. 그 대신 다시 이렇게 이야기하신다.   

"그래도 버릴 건 버려야지."   

 


아침마다 군더더기 없는 삶으로 회귀하려는 아버지를 본다.

아버지가 생에 대한 미련에 집착하지 아니하시고, 생에 대한 의욕만은 적절히 유지하시는 그 비법, 혹시 이 '버림'이라는 본능 때문일까?


나, 인생의 군살이 주렁주렁 늘어만 간다.

내 삶에 버려야 할 것들’ 버킷리스트라도 작성해 봐야겠다.

2019년도 두 달 남았다. 이제야말로 조금 더 날씬하게 살아야 할 때이다.



(그렇다면.. 흠...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 내 쓰레기방부터 '버림'을 시작해야겠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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