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드디어 우리 집에도 웨딩마치가 울려 퍼졌다. 동생은 갑자기 살이 쪄 버려 ‘덩치’가 생겼다고 했지만 다행히 동생은 자신의 덩치를 곱게 가려줄 어여쁜 드레스를 만났다. 물론 그 드레스를 만나기 전에 이미 평생 인연이 될, 한 남자도 만났다.
꽤 말이 없어 보이고 단정해 보이는 남자였다. 나와는 말 한 번 섞어 보지 않은 낯선 남자가 어느 날 내 동생의 남자가 되겠다고 우리 집에 성큼성큼 찾아왔다. 동생이 고른 남자였다.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우리 가족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자연스럽게 딴딴딴딴 딴딴딴딴. 신랑이 입장하고 신부가 뒤이어 입장하였다. 신부는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딸은 아버지의 발목을 부여잡거나 아버지의 등 뒤로 숨지 않았다. 그 여자는 이제 더 이상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너무 진부하게도 이 남자의 팔짱에서 저 남자의 팔짱으로 팔을 옮기는, 다소 구태의연한 예식의 순서대로 결혼식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예식 시작. 성당의 미사로 올리는 예식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흥성스러움을 본인들이 더 주체하지 못하는 듯했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악수를 나누고 걸걸한 웃음을 나눴다. 천주교 신부님의 진지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식장은 점점 ‘도떼기시장’이 되어 가고 있었다. 언니 된 자가 고개를 돌려 떠드는 사람들을 향해 한껏 얼굴을 찡그렸다. 내 동생 결혼식에서 떠들다니! 하지만 사람들은 언니의 본심을 오해하였다. 역시 동생을 먼저 시집보내는 언니라 그런지 오늘따라 인상이 안 좋아 보이는구먼? 왜 안 그러겠어, 맘이 맘이 아니겠지. 아직 결혼할 남자친구도 없다던데.
딸들은 이제 자기가 살던 집을 떠난다. 그리고 자기가 살던 집을 ‘친정집’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정이 많이 들었을 법한 집을 버리고 새 집으로 자신의 보금자리를 옮기고, 그동안 붙잡고 있던 부모님의 발목도 차츰차츰 풀어 드린다. 그 대신 더 젊은 남자의 발목을 부여잡는다. 물론 여자도 자신의 발목을 새로 얻은 남자, 곧 남편에게 꽉 붙들리고 만다.
그래, 너는 언제 시집갈 거니?
요새는 참견을 하려면 돈부터 내놓고 잔소리를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무료로 친척들 앞에서 공연을 한다. ‘동생을 먼저 시집보내서 좀 그렇겠다.’의 ‘좀 그런 게’ 뭔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보조를 맞춘다. 딱히 억울할 것도 없는데 무언가에 패한 사람 같다. 사람들은 나에게 의문의 1패를 안긴다. 새하얀 드레스의 승자 앞에서 동생이 사 준 내 예쁜 원피스마저 어쩐지 좀 누추해 보인다. 주변에서는 이제 내 차례가 되었다며 반가이 내 순서를 알려 준다. 그러나 나는 한사코 사양하며 뒤로 물러나온다. 누군가의 인생에 그리 쉽게 발목을 잡히고 싶지 않다. (물론 발목 잡아줄 사람도 오랫동안 없었거니와…….)
이 아비, 발목 좀 잡지 말어.
내 발목 걱정만 한창 늘어지게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결혼식을 다 치르고 밤이 늦은 거실에 세 사람이 모여 앉는다. 늘 친하고 진한 동지였던 우리 셋은 수고했어, 당신이 더 수고했지, 너도 수고했어, 서로를 격려하느라 술잔이 바쁘고 안줏거리가 바쁘다. 그러다 그만 아버지의 진심이 아버지의 입에서, 아버지의 가슴에서 쑥 빠져나온다.
"너도 이제 이 아비, 발목 좀 그만 잡아."
"???"
애비도 갈 길이 바쁘다
-야, 이놈들아.
삐쩍 마른 *애비 발목 좀 놔라.
가죽하고 뼈만 남은 이 애비의 발목을 언제까지 붙들고 있을 작정이냐.
갓 태어난 거미 새끼들은 그 어미의 가슴살을 한 점 남기지 않고 다 파먹은 다음, 비로소 그 어미 곁을 떠나더구나.
-이 애비를 욕되게 하지 마라.
-이 애비도 갈 길이 바쁘다.
2010. 3.
(*애비→아비)
아버지는 바쁘다. 앞으로든 옆으로든 뒤로든 아버지도 아버지의 길을 닦으며 어딘가로는 가야 한다. 하지만 두 과년한 딸들이 아버지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것도 꽤 오랜 시간 잡고 있었다. 큰딸은 되지도 않는 임용고사를 본다고 육칠 년을 제 아비에게서 용돈을 얻어 썼고, 땡전 한 푼을 안 벌어왔다. 둘째 딸은 외국어 관련 학과를 다닌 탓에 외국에 가야겠다고 선언하였고, 돈이 남아돌지 않는 형편에도 우리는 동생에게 힘을 보탰다. 아버지의 양쪽 발목이 점점 늘어지고 있었다.
“잘 다녀올게요.”
“아버님, 어머님. 잘 다녀오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다행히도 그 둘째 녀석이 아버지의 발목을 놓고 저 멀리로 신혼여행을 떠나려 한다. 시집을 보낸다는 섭섭함도 있겠지만 가뿐한 마음으로 녀석을 보낸다. 아버지는 이제야 인생 숙제 하나를 완성한 느낌이다. 삼십 년 넘게 머리에 이고 온 과제물 하나가 드디어 제 갈 길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한숨을 돌린 것도 잠시 뿐.
“장인어른, 여기요.”
그런데 몇 달 후, 갑자기 사위가 무언가를 내민다. 어르신 둘과 처형 하나가 골똘히 사진을 들여다본다. 처형이 먼저 깜짝 놀란다. 뒤이어 엄마가, 그리고 아버지가 예상하지 못한 선물에 화들짝 놀란다.
“쌍둥이래요.”
게다가 추후에는 그 사진 속 점 하나가 둘이었다는 어마어마한 이야기까지 흘러나온다. 아무 생각 없이 ‘한 번에 둘 낳고 좋겠네’라고 아버지는 무심결에 커다란 축하의 말을 건넨다. 아버지가 태평하게 축하나 하고 있는 것 같아, 옆에 있던 큰딸이 아버지 옆구리를 쿡 찌른다. 아버지는 지금 발목 운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마음의 준비를 시켜야겠다.
“아버지, 슬슬 몸 좀 푸셔야겠는데요?”
“응?”
“이제 곧 아버지 차례입니다.”
“뭔 차례?”
아버지는 자기도 모르게 발목을 움츠린다.
“두 놈이라잖아요.”
이제 곧 할아버지 발목에 손자들이 하나씩 주렁주렁 매달릴 것이다.
"하부지? 하부지?"
아직 세상에 오지 않은 녀석들이 벌써 할아버지 발목을 노린다. 그 행복 덩이덩이, 합이 두 덩이가 주렁주렁 아버지의 양쪽 발목을 하나씩 책임질 것이다. 아주 무럭무럭 둘째 딸의 배 속에서 자라고 있는 두 녀석들.
“하부지, 쫌만 기다리세요. 이제 곧 하부지 발목 잡으러, 우리가 출격합니다!”
무럭무럭 세월이 지난다. 초음파 사진 속 점 두 개가 어느덧 앙증맞은 두 아가가 된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할아버지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큰딸의 예언은 한 치의 오차도 없다. 만 세 살이 넘은 쌍둥이 녀석들의 입에 밥을 떠먹여 주고 있다. 함께 ‘헬로카봇 백악기 시대’나 ‘뽀로로 극장판 공룡섬 대모험’ 같은 만화를 같이 시청하면서 말이다.
하부지는 요새 몽땅 자기 발목을 내어놓고 산다. 발목 잡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 보아도 쌍둥이 손자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사실 그런 말에 관심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