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재입사]
재입사 후 신중하게 일을 잘하려다 보니, 예상하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나에게서, 나..나에게서 ... (후덜덜...)
그... 그녀의 냄새가 난다. 내가 제일 혐오하던 그 냄새. 나와 갈등이 있던 그녀...
그녀의 냄새가 내 안에서 무럭무럭 자란다.
“저는 눈앞의 것만 보는데 선생님은 두루두루 크게 보고 생각을 하시더라고요.”
온라인 수업의 대상을 프로그램별로 어떻게 짜야 할지 고민하는 회의가 이어진 후, 강사들이 차후 메일로 각자 피드백을 주기로 했다. 나도 작은 의견을 냈다. 내게서 나온 그 소심한 의견을 두고 새로 뽑힌 강사님 한 분이 낯선 말을 내게 건넨다.
"선생님은 크게 보고 계시더라고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녀는,
"선생님, 몇 월 며칠에 수업할 때, 수업 앞뒤 순서를 어떻게 할지는, 베테랑이신 선생님이 정해 주세요."
'헉. 이게 머선129. 내가? 뭐?
베... 베테랑?'
그 말을 듣자마자 과거의 내가 소환된다.
그리고 어김없이 나의(?) 그녀도 내 회상 장면에 동반 출연한다.
“와. 선생님은 정말 베테랑이셔요. 어찌 그걸 다 아셔요?”
내가 보기에 그녀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없어도 너무 없었다. 사업을 수주한 용역업체에서조차 그녀에게 기댈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정말 베테랑이었다. 생판 초보였던 용역업체보다도 이곳의 생리를 더 잘 아는 6년 차의 베테랑이었으니까. (해당 기관에서 일하다 용역업체 소속의 직원이 된 덕에 그녀는 경력과 짬밥과 인맥이 넘쳐났다.)
그녀가 어리숙한 나를 데리고 부단히도 애쓰며 우리의 일을 이끌어 나갔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안다. 그러나 나는 하나하나 또박또박 배워야 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 습성은 일의 세계에서는 아주 부적절한 습성이었다. 물어뜯기기 쉬웠고 생존하기는 어려운 습성. 어쩌면 그녀는, 나의 이 습성이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은요, 아 그냥, 선생님은 느려요."
그래, 너의 말이 맞다. 나는 입사 후 1년이 지나도록 자꾸 느리기만 한 사람이었다. 절대 베테랑이 아니었다. 나는 눈치를 챘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챙기지 못한 눈치를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느라 나에게서 그녀의 농담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그녀의 성마른 악담만이 내게 남게 되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베테랑이신 선생님께서 잘 이끌어 주세요."
그런데 새로 들어온 동료 강사가 내게 ‘베테랑’이라는 단어를 자꾸 꺼낸다.
'하아....내가 예전 그녀에게 쓰던 말을, 돌고 돌아 내가 다시 도로 듣게 되다니...'
지나가던 개가, 아니 지나가던 그녀가 웃을 일이다. 베테랑, 이 단어가 주는 어감만 들어도 무게가 느껴진다. 얼른 내려놓고 싶다, 이놈의 베테랑.
아 잠만. 잠깐만... 그런데 어쩌면 그녀도?
돌고 돌아 재입사를 하고 보니 내가 그녀에게 무심코 건넸던 어휘들이 그녀를 조금은 괴롭혔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베테랑이라느니, 어떻게 그렇게 잘하시냐느니, ‘와’라는 감탄사가 섞인 환호와 박수…….
그녀는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그녀는 거북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슬슬 그녀는 나의 어휘들에 질렸을지도 모른다. 어휘만 달싹일 뿐 분발하는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나의 하루하루의 경력들. 그녀는 '그럼 너도 베테랑이 되면 되는데 왜 가만히 앉아서 감탄만 하고 있느냐'고, 나의 느린 성장 속도에 솜방망이질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베테랑: 어떤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하여 기술이 뛰어나거나 노련한 사람.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온 '베테랑' 정의를 찾아봤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이 사전의 정의를 거부하고 싶다. 적어도 내게서만은 다른 뜻풀이로 내 사전을 꾸리고 싶다.
-베테랑: 어떤 분야에서 오랫동안 종사하지는 아니하였지만, 약간의 기술은 있어 재입사할 정도는 되는 사람.
이런 나만의 뜻풀이를 가지고 내 안의 부담을 도려내고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만 직업 기술을 벼리도록 하자. 이 정의대로라면, 난 베테랑이다. 뭐 베테랑이 아니라면 또 어떤가. 이미 내 삶에 있어서만큼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난 베테랑이다. 누군가의 인정과 수락 따위는 상관없다.
기존의 베테랑을 오늘부로 내 사전에서 삭제해야겠다.
그리고 내 안에서 자꾸 자라려는 그녀의 모습도 삭제해야겠다.
재입사 후 종종 그녀의 위치에 서 있는 내가 보여 곤혹스럽지만,
나, 그녀처럼 베테랑일 필요도, 그녀를 닮을 필요도 없다.
나는 나고 그녀는 그녀다.
과거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