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와 새드니스의 컬래버레이션

[돌고 돌아 재입사]

by 봄책장봄먼지

카메라 감독님이 조명까지 비추어 주니 2배로 더 떨린다. 세 명의 강사 가운데 오늘 일정이 되는 강사는 두 사람이다. 나와 다른 한 분.


오늘은 진로 페스티벌 온라인 영상을 찍는 날이다. 나 말고 다른 강사님이 우리 기관 소개의 앞부분을 맡기로 했다. (나는 뒷자리로 밀려났다. 내가 이리될 줄 진즉 예견했다! 나에게 앞부분-기관의 얼굴과도 같은 부분-을 맡기면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시고, 뼈 때리며 자신의 지난 선택-나를 앞세운 선택-을 후회하셨던 거겠지.)


"안녕하세요. ****원 전문강사 ***입니다! 반갑습니다. 우리 ****원은 이런저런 일들을 합니다. 자, 그럼 어떤 체험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아볼까요, 출바알~!(예쁜 손가락으로 다음 장소를 가리키며)"


다른 강사님이 포문을 연다. 카메라 감독님도 그 강사님을 보고 '완전 프로'시라며 난리다. 목소리도 영롱하고 아나운서 같다. 어쩜 그리 자연스러운지. 누가 봐도 딱 경력자 같아 보이고, 딱 이 기관의 마스코트 같아 보인다. 재입사한 사람이 있다던데 그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인가,라고 여길 정도다. (그래 저런 사람이 강사를 해야지, 암 그렇고 말고. 가만.. 그럼 난? 난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여? 현실을 자각하고 있던 찰나, 어느새 내 차례가 되고 말았다.)



어, 잠깐만요. 다 다시 할게요.


연예인이나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카메라 앞에서 내가 지금 그 말을 하고 있다. 자꾸 대본을 잊어버려 감독님을 당황하게 만든다. 내가 쓴 대본을 내가 까먹는다.


-어, 다시 할게요. 죄송해요, 감독님.

-준비되시면 그때 시작하셔도 돼요. 준비 다~ 되면 천천히 시작하세요.


준비가 다 된 뒤 시작하라고 한다. 이 말인즉슨, 자꾸 엔지를 만들지 말라는 뜻일까? 그럼에도 어김없이 난 또 엔지.. 그리고 엔지. 하나 더 엔지.


엔지를 밥 챙겨 먹듯 꼬박 챙겨 먹고, 그래도 어찌어찌 한 구역의 체험 소개를 마치고 잠깐 쉬는 시간이 왔다. 그때, 용역 업체 선생님께서 나에게 갑자기 물으신다. "혹시 립스틱 같은 거 있으세요? 얼굴이 너무 허옇게 나와서요." 거울을 보니 내가 보기에도 내가 좀 아파 보이긴 한다.(마스크 쓰고 촬영할 줄 알고 외모에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아, 이제 됐다. 그래도 입술을 그렇게 바르니까 밝아 보여요!"

(코로나 시국인데도 업체 선생님 한 분께서 선뜻 뻘건 립스틱을 빌려주셨다.)



'그래도' 밝아 보인다니 다행이다. 그렇게 그날 난 남의 입술연지까지 빌려 쓰면서 무사히 촬영을 마쳤다. (물론 나는, 카메라 감독님에게서 '프로' 따위의 발언은 결코 전해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틀 뒤.

감독님이 편집한 영상이 각자의 메일로 공유됐다.

'어디 한번 내 얼굴이 얼마나 바보 같이 나왔는지 구경이나 해 볼까? 하하하.'


영상의 재생 단추를 누른다. 처음 부분은 발랄한 강사님이 자기소개와 기관 소개를 해 주신다. "출바알!" 아주 경쾌한 목소리가 화면을 가득 메운다. 나라도 저 목소리, 저 표정이면 저 기관에 가고 싶을 것 같다.

그렇게 하이톤의 목소리, 기분 좋은 표정이 계속 이어지다가,



갑자기 중간부터 ... 난데없이..

새드니스가 나온다.


혹시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보셨는가?

조이(기쁨이) 옆에서 우중충한 표정과 말투로 라일리(주인공 여자아이)의 핵심 메모리를 푸르게 푸르게(슬프게 슬프게) 만들던 그 녀석 말이다.

영상을 보자마자, 아니, 다른 강사님의 얼굴에서 내 얼굴로 화면이 갑자기 전환되자마자 딱! 알겠다!


아하, 난 새드니스였다!



다른 강사님: 다음은 김** 선생님(=나)이 다른 체험 프로그램을 소개해 주실 거예요. 우리 친구들, 준비되셨죠? 다시 출바알~~~

'나'라는 강사: 안녕하세여.... 이번 프로그램은... 우리말에 관해 궁금한 것들을 어떻게 물어볼 수 있는지 알려 주는 프로그램이에여.... 어문규범을 배워 보는 시간이기도 한데여....



화면에 무슨 먹칠을 했나? 화사하던 칼라 티브이에서 흑백 티브이로, 순식간에 화면 전환! 무슨 마법을 걸었는지 그 밝던 분위기 다 날아가고, 낮은 어조의, 다소 중성적인 목소리가 칙칙하게 화면 속 세상을 누빈다.


비가 내릴 것만 같고 곧 밤이 다가올 것만 같은 화면..

바로.... sadness의 기운!!



그 화면을 보며 나,

혹시 또다시 좌절했느냐고?


아니 아니. 천만의 말씀!

나는 다행히 전혀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깔깔거렸다. 알고 보니, 난 강의할 때만큼은 완벽한 '새드니스'였던 것이다! 슬퍼할 필요가 없었다. 원래 새드니스였는데, 새드니스가 새드한 건 당연했다!! (요샛말로 새드니스가 새드니스했다! 새드니스 이즈 뭔들~)



나, 드디어 나의 캐릭터를 찾았다. 난 절대 '조이' 같은 강사가 될 수는 없다. 억만금을 주면서 하라고 해도 난 못 한다. (속담을 몸동작으로도 멋지게 설명하시는 조이 선생님과 달리 나는 사물 같은 것을 이용해야 그나마 속담을 어찌어찌 설명할 수 있다. 왜냐? 나는 조이가 아니니까! 나는 새드니스 강사니까!)



인사이드 아웃에서도 나온다.

주인공 라일리는 슬픔을 통해 세상을 배운다. 슬픔, 즉 새드니스로 인해 다시 가족의 소중함, 일상의 귀중함을 되찾는다. '우는 과정' 즉, '슬픔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삶의 다른 여정들로 건너가기 어려웠던 주인공, 라일리. 폐허가 되어 버린 지난 기억(핵심 메모리)의 섬들은, 조이와 새드니스, 그리고 여러 감정들의 합작으로 다시금 새로운 핵심 메모리를 만들게 된다.

이 세상에 '조이'만 가득하면 우선은 온 세상이 화창하고 즐거울 것이다. 그러나 새드니스도 딱 조이만큼 필요하다. 나 같은 '새드니스'도 있어야 이 세상이 조화로운 게 아닐까. 때로는 새드니스를 통해 깨닫는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난 이 재입사 일터에서 조용하고 주춤거리고 크게 웃지 아니하고, 수업을 시작할 때면 더 다운된 목소리로 아이들의 하품을 제조한다.


오호 좋았어. 아주 내 수업, 잘 굴러가고 있군. 아무도 나에게 집중하지 않아~ 그래, 바로 이거다~! (새드니스 강사, 이렇게 어이없는 자기 합리화로 '자뻑'에 빠져 있는데 그 새드니스를 더 오만하게 만드는 소리 하나가 어디선가 날아온다.)


"속담이 재치 있고 재밌다."

카메라 모니터링 중이었던 한 선생님이 내 수업이 끝나고서 이 댓글을 내게 읽어 주셨다. 오잉? 재치 있다고?

그래그래, 스물넷의 사람 가운데 스물세 사람이 다 졸고 있지만, 단 한 명이라도 지금 이 새드니스의 말을 듣고 있다면? 누군가는 별나게도 이 '새드니스 봄먼지'가 자기 취향인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거면 됐지 뭘 더 바라?



내일도 이 새드니스,

아주 쎄게~~~ 쌔드SAD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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