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재입사]
-방금 누구랑 이야기한 거야?
등 뒤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김장을 마치신 후 한숨 자고 나오신 엄마가 내 방으로 들어와 내 곁에 자리를 잡고 앉으신다.
-아, ◯◯원 선생님.
-왜?
-아, 다음 주 수업 취소됐다고.
-그래?
-아니, 취소가 되긴 했는데, 원래 5교시였던 수업을 3교시로 축소해서 한대. 근데 그건 다른 선생님 한 분이 혼자서만 하기로 했대.
-아...
-어. 뭐, 그렇게 됐어. '잘린' 건가, 나?
-잘렸구먼, 잘렸어~~!
한 움큼 남아 있던 내 역량조차 가위질당해 버린 조금 전의 내 후일담을 엄마와 잠시 공유한다. 그러다 갑자기 이 수다쟁이 모녀에게서 잠시 수다가 끊긴다.
엄마는 지금 딸내미인 내가 무슨 말이든 이어서 말해 주길 바라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살며시 도로 등을 돌려 앉는다. 내 말을 기다리시는지, 내 방에서 나갈 타이밍을 기다리시는지 아직 그다음 행동을 결정하지 아니하신 채 엄마는 여전히 내 뒤에서 가만히 앉아 계신다. 엄마의 그 모습이 내 방 베란다 유리창으로 반사되어 내게도 보인다.
그럴 수도 있지, 뭐,라고 빈말이라도 해 드릴 것 그랬나.
이렇게 잘리다가 아예 잘리는 거 아냐,라고 너스레라도 떨 것을 그랬나.
빈말로도 너스레로도 메우지 못한 몇 초간의 시간. 의도하지 않은 정적과 공백이 내 방에 흐른다. 결국 엄마가 먼저 이 공간의 침묵을 깨고, 내 방 침대에서 본인의 엉덩이를 떼내어 문 바깥으로 향하신다. 뒤돌아본 엄마의 등이 어쩐지 내 뒷모습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다급히 다시 그 등을 불러 세운다.
-엄니는 아까 김장하고서 낮잠은 좀 주무셨고? 난 팔꿈치에까지 고춧가루가 막 묻었더라고~~
엄마의 등에 대고 크게 궁금하지 않은 물음들로 대화를 겨우 이어 간다.
-아니, 난 잠을 잤는지 안 잤는지 모르겠다. 잔 것도 아니고 안 잔 것도 아니고.
방문을 나가시며, 엄마는 형식적으로 대답하신다.
엄마는 이제 딸자식의, 어쩐지 굽어 보이는 어깨를 뒤로 하고 부엌으로 향하신다. 타다다닥. 가스 불이 불꽃을 피우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저녁 시간이 다 되었다는 소리다. 엄마는 엄마의 일상, 혹은 노동 속으로, 늘 그렇듯 담담히 걸어 들어간다. 나도 다시 일상으로 들어간다. 불쏘시개의 가위질이 이제 막 정리가 끝난 모양새다. 심심한 가위질에 스스로 위로를 전해야 할 시간이다.
'너 잘렸어, 인마.'
일기장을 펼쳐 이 말을 나 스스로에게 적어 준다. 돌고 돌아 어느 곳에 가든 나란 녀석은 엄마에게 멋진 딸이기는 영 글렀다,라고 덧보태 쓴다. 멋진 딸은 고사하고 짐짝이나 되지는 말아야 할 텐데...
이리 혼자 궁상을 떨고 있는데, 저 멀리 밥솥에서 기적이 운다. 밥이 피어 올리는 기적의 연기는 늘 그렇듯 일상의 기적이 된다. 그때, 뻐꾸기 우는 소리와 함께 엄마의 목소리가 힘차게 들린다.
-오늘 (수업) 잘린 사람, 와서 밥 먹어~~
오잉? 벌써 밥이 다 됐다고?
나는 노트북 모니터를 후다닥 덮고 나 대신 다른 강사를 쓰겠다던 조금 전의 그 통화도 덮고, 방금 전까지 엄마와 공유하던 침묵도 덮고, 좌절하는 척하던 몇 분 전의 나란 인간도 덮고, 주린 배와 돋아나는 식욕을 세상에 펼치며 엄마의 주방으로 냅다 달린다.
'흠.. 그래 이 냄새야~~'
역시, 세상에서 어떤 가위질을 당하든,
엄마의 주방에는 늘 딸내미를 향한 구수한 위로가 있다.
'그래, 이 맛이야~~ 이 맛에 내가 잘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