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덕 3일 차]
“언니, 네이버 아이디 찾아서 투표 좀 해 주세요. 매일매일 하루 한 번 부탁합니다. 이번 주 일요일까지요.”
나는 누군가를 '언니'라고 부르며 투표 링크를 보낸다. 물론 나에게 ‘찐언니’는 없다. 아는 언니도 거의 없다. 저 문장 속 ‘언니’는 내 25년지기 친구다. 무언가를 부탁할 때 나는 동생이 된다. 아주 경건히, 그리고 비장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온라인 사전 투표를 요청한다.
이 친구로 말할 것 같으면…….
1. 현재 일본 연예인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음. (그 ‘누군가’의 이름조차 난 기억이 안 난다. 나의 자세를 반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2. 그 연예인을 보려고 회사 휴가까지 내서 일본에 다녀온 이력이 있음. (팬데믹 때는 온라인 콘서트에도 참석.)
3. 여러 연예인들을 좋아해 온 이력이 몇십 년 차.
4. 최근 어떤 연예인을 갑자기 (또) 좋아하게 되었는데(드라마를 보다가 그렇게 됨), 자기가 올린 댓글을 해당 연예인이 기사에 직접 언급함. (기자가 내 친구의 댓글을 기사 제목으로 뽑을 정도.)
5. 4번에서 언급한 연예인에게 책 선물도 보냄.
6. 아무튼 연예인을 좋아하면 확실히 끝까지 좋아하려는 경향이 있음.
7. 누군가가 연예인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혀를 끌끌 차는 모습을, 그 친구에게서는 본 적이 없음. 입덕의 대상이 누구인지 같이 궁금해해 줌.
누구를 열렬히 좋아하다가 곧 시들어 버리곤 하는 나와는 사뭇 다른 자세로 연예인을 좋아해 온 오타쿠 선배님. 내 친구와 나는 일찍 시집갔으면 벌써 중학생, 고등학생 자녀를 뒀어야 할 '어마 무시한' 나이가 되었지만 시집을 안 가서 그런지 원래 천성이 그런 건지, 아직도 만나면 연예인 이야기를 종종 한다. (애 키우는 이야기나 남편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그럴 수도 있고 원래 쭉 해 오던 이야기라 그럴 수도 있다.)
사실 나는 이런 성향을 벗어던진 지 오래되었다고 생각했다.(아니, 착각했다.) 사는 게 퍽퍽할 땐 나조차도 이 친구에게 ‘연예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할 때도 됐지 않았나.’라는 경거망동의 시선을 던지기도 있다. 가끔은 ‘입덕’을 불편하고 하찮은 시선으로 바라볼 때도 분명 있었다. '아직도 연예인 이야기야?'
세상에 얼마나 심각하고 깊은 고민들이 많은데 '얼마나 시간이 남아돌면’ 연예인 고민을 하나. 왜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연예인 걱정이다."
그런데 내가 요새 그 걱정을 한다. 타 가수보다 조회 수가 낮은 영상에 찾아가 들입다 반복 재생을 하며(물론 새로고침도 필수) 조회 수를 조금이나마 보태려 한다. 여기 들어가 응원의 댓글을 답시다, 라는 글을 읽으면 그 링크를 따라 들어가 응원의 댓글도 달아 본다.
그러나 아직도 상대에게 내 가수를 추천, 아니 강요하는 일은 어쩐지 미안하다. 겸연쩍다. 어제 내가 동네 친구들의 채팅방에 결국 투표 링크를 투척하지 못한 것도 나의 이런 소심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투표 링크를 매일 보내야지ㅋㅋ, 덕심이 부족하구먼!"
그런데 갑자기 내 오타쿠 선배님이 나에게 이런 일침을 가한다. 내 가수에 관한 투표인증 사진을 함께 전송하면서... 매일매일 투표를 해야 하는데 매일 해 달라고 괴롭히는 건 어쩐지 미안해서 오늘은 투표 종용을 건너뛸까 했더니 이 친구, 자진해서 내 가수에게 투표를 해 주었다.
‘아하, 나는 덕심이 부족했던 거구나.’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연예인 걱정이라지만, 사실 요즘 나의 걱정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 걱정이다. 그런데도 내 가수 잘되는 것 보고 싶은 마음보다 남들에게 내가 어떻게 비칠지, 혹여 남들에게 민폐를 끼치지는 않을지, 순전히 나만 걱정했던 거다.
"저 친구 잘했으면 좋겠다."
내 가수를 향한 모 심사위원의 말처럼, 현재 내 마음이 그렇다면 난 그냥 그 흐름대로 가는 게 맞다.
"언니, 오늘도 부탁합니다. 이름, 얼굴 헷갈리지 말고 투표 잘 좀 부탁!"
"오키. 오타쿠 마음은 오타쿠가 알지!"
역시 오타쿠 선배님은 다르시다. 앞으로도 고개 숙여 많이 배워야겠다.
나는 이렇게 오늘도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연예인 걱정으로 하루를 마무리해 본다.